정욕을 버리고 주 앞에서 낮추라
야고보서 4장1-12절 2016/10/5(수)
사도 야고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 속에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하나를 급하게 써서 보내게 됩니다.
바울의 편지처럼 한 교회나 한 사람을 지목해서 쓴 편지가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해당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사적인 편지이지만 개인적 문안보다는 교회공동체를 위한 회람형식의 공문이지요.
그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얻게 되는 두 가지의 능력(권능)으로 지금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어려움과 여러 가지의 고난을 잘 극복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지혜(소포스)의 권능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이지요.
경험으로 얻는 그리고 학습을 통하여 얻는 지식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다시 말해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사도 야고보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성령의 조명을 받는 지혜)의 권능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분별력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를 위한 성숙한 판단력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대할 때 차별하여 대했다는 것입니다.(2장 1-13)
부자와 가난한자, 상전과 종, 유대인과 헬라인 등
그 결과 하나가 되어야할 교회 공동체는 아주 큰 분열의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우선 끼리끼리 모이는 파당이 생기게 되었구요.
파당이 생겼으니 자기 파당이 아닌 남을 비방하게 되었구요.
남을 비방하니 시기와 다툼의 죄까지 짓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까(풀어나갈까)?
그렇게 해서 사도 야고보가 첫 번째로 내 놓은 해법이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인 분별력 곧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는 해법을 제시하게 됩니다.
1장 5절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두 번째는 총명(에피스테몬)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총명이란 우리 알고 있는 사전적 의미의 기억력이 좋은 재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밝히 들러나게 하는 믿음의 전문가가 되라는 말입니다.
말만 앞세우는 자가 아닌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의 전문가가 되라는 것이 바로 총명의 뜻입니다.
그래서 1장 6절에서 오직 믿음을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지혜와 믿음’ ‘지혜와 총명’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회공동체마다 파당(부자와 가난한자, 상전과 종, 유대인과 헬라인 등)이 생기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다 선생이 되려 했고 다 가르치려하는 자들이 되려 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겸허히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이런 경고를 남긴 것입니다.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가르침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난다고 했습니까?
‘들음’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들을 때 그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싹 엎드려 들을 때 그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옛날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신라 48대 경문왕과 관련된 우화인데 그리스 신화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백성들이 바라는 임금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귀가 길고 큰 만큼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높은 자리에 앉으면 제일 먼저 막히는 것이 귀 구멍입니다.
귀 구멍이 막히니까?
입만 바쁘지요.
자기 말만하고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 자꾸 가르치려하는 것입니다.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3장 1절에서 경고를 주는 것입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사도 야고보가 목회할 당시 가르칠 수 있는 자격 즉 선생님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헬라어로 ‘소포스’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소포스’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우리 성경에서는 그것을 지혜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제대로 알고 제대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이것이 선생님이 되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헬라어로 ‘에피스테몬’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그것을 총명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특별한 지식이나 훈련을 받은 전문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생님의 두 조건 곧 지혜와 총명으로 파당 짓는 데 앞장서고 있는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에게 충고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음을 가르치는 자이면 가르치는 자답게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시기함이나 성냄이나 다툼이나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에서 벗어나 믿음의 귀가 펑 뚫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 1장 2장 3장의 요약입니다.
1-3장의 결론입니다.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회’란 무엇인지를 좀 이해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라고 부릅니다.
원래는 도시형태의 국가였던 고대 그리스의 민회를 우리가 ‘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어떤 정책의 이슈가 생기면 그 도시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구성원이 되어서 토론도하고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기구가 ‘에클레시아’입니다.
‘민회’이지요.
그러던 고대 그리스 민회의 이름인 이 ‘에클레시아’가 나중에 그리스도 교회를 뜻하는 공식적인 이름이 됩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회당인 ‘시나고그’와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모이는 집회장소를 ‘시나고그’라고 불렀는데 3가지의 기능이 있었습니다.
첫째, 베이트 데필라, 예배 드리는 집
둘째, 베이트 하미드라쉬 가르치는 집. 아카데미, 학원이지요
셋째, 베이크 하크네셋, 회의 하는 집입니다.
이것을 우리 성경은 회당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회당 곧 ‘시나고게’와 구분 짓기 위해 사용된 말이 ‘에클레시아’입니다.
이것이 훗날 그리스도의 교회의 공식 명칭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 뜻도 조금 달라집니다.
민회가 아닌 그리스도인의 영적 유기체 모임 곧 사귐의 공동체로 그 뜻이 바뀝니다. 이처럼 교회란 조직(당회)이나 교회건물(예배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즉 성도들의 영적 유기체, 사귐의 모임이 바로 교회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유기체요, 사귐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문제가 생깁니다.
바로 앞서 말한 것처럼 시기 다툼이라는 균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교회 안에 분쟁과 다툼 사실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교회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있을 때마다 또 다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롭게 합시다.’ 입니다.
문제의 해결보다는 그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지요.
그 결과 한국교회는 부끄럽게도 가장 많은 교단을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은혜롭게 합시다.’라는 문제의 회피는 결국 그 문제를 그대로 남겨 두고 분열과 분열에 따른 혼란만을 야기 시켰다는 것이 교회사가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의 돌직구는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새겨 볼 말씀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 유기체의 모임으로 구성된 만큼 다툼과 싸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것을 야고보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툼과 싸움이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야고보는 먼저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싸움과 시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야고보의 진단입니다.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정욕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정욕, 자기 욕심이지요.
이기심입니다.
계속해서 2-4절입니다.
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4: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왜 교회가 분쟁과 분열의 모습을 보이는가?
간음하는 여자들처럼 세상과 벗하는 그래서 개인의 이기심과 자신의 정욕만을 내세우는 하나님의 원수 되는 자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가 내린 진단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까요?
사도 야고보는 네 가지로 그 해법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신을 벗고 복종한 모세처럼 자기 고집의 신, 자기 자랑의 신, 자기 욕심의 신을 벗고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야생마가 주인의 손에 의해 길들어진 것처럼 하나님 앞에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두 번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자신의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하는 신을 벗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세 번째 주 앞에서 늘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지 말고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겸손이지요.
마지막 네 번째 형제를 비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실제적이고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요.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4: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왜 우리가 형제를 비방해서는 안 됩니까?
입법자와 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비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들의 영적 유기체요 사귐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욕심, 곧 정욕이 들어가면 교회는 다툼과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까?
사도 야고보가 제시하는 방법은 4가지입니다.
1. 오직 하나님께 입니다. 마귀를 대적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입니다.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품은 성결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경청이지요
4. 서로 비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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