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룻기 2:5-13 경계를 넘어

心貧者 2016. 5. 10. 12:06


경계를 넘어
룻기 2:5-132016/05/08(주일오후)

2: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2: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2: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2: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와 그리고 우리 가정위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유대인들은 주요 절기가 다가오면 그 때마다 다섯 개의 두루마리 책을 선택해서 읽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메길로트’(Megilloth)라고 부릅니다.

메길로트

절기 때 마다 읽는 다섯 두루마리 책을 말하는데 어떤 책이 있을까요?

룻기 아가 전도서 애가 에스더입니다.

이 다섯 개의 두루마리 성경책을 메길로트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다섯 권의 책 중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유월절 때 읽는 책은 무엇이겠습니까?

아가서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읽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를 읽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초막절 때는 어떤 책을 읽었을 것 같습니까?

전도서입니다.

초막이란 나뭇가지로 어기설기 만든 임시 가건물을 말합니다.

임시 가건물에 지나지 않는 초막과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서의 가르침이 맞물리기 때문에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애가.

슬픔의 노래이지요.

그래서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 기념일에 낭독되었습니다.

반면 에스더는 페르시아(옛날 성경은 바사제국) 통치자들의 학살을 모면한 부림절에 읽었습니다.

 

이제 남은 책은 딱 한 권입니다.

어떤 두루마리의 책이지요?

룻기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기록된 룻기는 어느 절기에 읽었겠습니까?

오순절입니다.

보리수확의 시작을 알리는 오순절에 읽었습니다.

다음 주가 교회 절기 상 오순절입니다.

왜 유대인들은 보리 수확철인 오순절이 돌아오면 룻기의 두루마기 성경책을 펼쳤는지 잠시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오늘 본문을 선택하였습니다.

 

먼저 본문에 들어가지 전에 집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절기 마다 특정 본문을 선택해서 반복적으로 읽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두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역사의 기억을 되새기자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역사의 기억을 되새겨 다시 한 번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갱신하자는 것입니다.

둘째, 흩어진 공동체의 결속입니다.

이스라엘 참 비운의 나라입니다.

주후 70년 이후 거의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흩어져 살아온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비록 약속의 땅 이스라엘에 머물지 못하고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래서 디아스포라라는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유대인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유대인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고향을 하나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룻기.

현대문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아주 짜임새 있는 내용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도 뚜렷하고 한 편의 드라마처럼 플롯 곧 이야기의 구성도 아주 정교합니다.

 

역사의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극심한 가뭄이 임하게 됩니다.

기근 앞에는 장사가 없지요?

배고픔을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 때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고향 유다 베들레헴을 등지고 요단강 건너 모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방인의 땅에 정착한 것입니다.

엘리멜렉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아주 좋지요.

하지만 그 이름의 뜻과 달리 엘리멜렉은 그릇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모압에 정착한 엘리멜렉은 아내인 나오미와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남겨두고 죽고 맙니다.

비극이지요.

살고자 선택 한 피난길이 곧 죽음의 길이 된 것입니다.

말론과 기룐.

고향으로 돌아갈 형편이 못되자 그들 역시 아버지처럼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기고 모압 사람 룻과 오르바를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두 아들 역시 그 이름의 뜻대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말론, ‘병약하다라는 뜻입니다.

기룐, ‘나약하다는 뜻입니다.

 

이 두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 엘리멜렉의 죽음보다 더 비참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업 무를 자를 남기지도 못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홀로 남은 나오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를 나오미 곧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나를 무엇이라고 부르라고 말합니까?

마라입니다.

마라쓰다’, ‘괴롭다라는 뜻입니다.

마라, ‘괴로운 여인’, ‘쓰라린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라와 같은 나오미의 인생에 드디어 역전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모압에 정착한지 십 년 만에 이스라엘 땅에 임한 기근이 끝났다는 소식을 나오미가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자 마다 나오미가 택한 길은 다시 고향,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청상과부가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를 불러놓고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처음에는 두 며느리 모두 시어머니의 제안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시어머니 나오미가 설득하자 14절의 말씀처럼 오르바는 눈물로 시어머니와 작별하고 고향에 남지만 룻은 기어코 나오미를 따라나서게 됩니다.

그때 시어머니에게 말한 룻의 고백은 오늘 날에도 가슴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의 고백 다시 한 번 곱씹어보지요.

첫째, 뭐라고 말합니까?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지요.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하는 것만큼 큰 사랑의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둘째,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자신의 조국, 자신의 혈연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셋째,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어머니 나라의 백성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모압 여인 룻,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룻은 이방 여인 곧 모압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된 마태복음 1장에 당당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2장으로 돌아옵니다.

2장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두 여인 곧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삶이 얼마나 곤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선 먹고 사는 길이 가장 막막했지요.

그러자 룻이 시어머니에게 아주 현실적인 제안 하나를 합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보리를 추수하는 오순절쯤이었던 모양입니다.

밭에 떨어진 보리 이삭이라도 줍는 일을 해 보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방도가 없었던지라 나오미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을 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참 희한합니다.

룻이 보리 이삭을 줍던 밭이 바로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이지요.

때 마침 추수를 독려하기 위해서 밭에 나왔던 보아스는 낯선 이방여인을 발견하자일꾼들을 감독하는 젊은이에게 묻습니다.

2: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2: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다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참 친절하지요.

이삭을 주우려고 다른 밭으로 가지도 말고 보리를 추수하는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우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친절이 어디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남자 일꾼들이 추근거리지 못하게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목이 마르거든 서슴지 말고 일꾼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시라고까지 친절을 베풉니다.

 

감동이지요.

아무리 마음이 풍년인 추수철이라지만 세상에 이런 주인, 이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이방 여인 룻을 향한 보아스의 축복입니다.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우리가 합리적인 의문을 하나 품어야 합니다.

왜 보아스가 일면식도 없는 룻에게 그것도 모압 여인에게 친절을 베풀었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가붙이였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룻이 아름다워서였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보아스에 대한 일물을 재조명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보아스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의 근거로 다윗의 증조할아버지로 기억합니다.

다윗-이새-오벳-보아스.

, 맞습니다.

보아스가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오벳-이새-다윗) 맞습니다.

보통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아스, 누구의 아들입니다.

보아스를 낳은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기생이고 이방여인입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될 때 이스라엘을 도왔던 기생 라합의 아들이 바로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가기를 낳은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생 라합.

그의 집이 여리고 성벽 위에 있었던 것처럼 기생 라합은 성 안과 성 밖 경계지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혈통 상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믿음의 응답으로 볼 때는 어떻습니까?

그녀 역시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씨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기생 라합과 그의 가정위에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생 라합의 아들이었던 보아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은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보아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아스가 모압 여자 곧 이방 여인 룻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푼 이유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다음 주가 오순절입니다.

제가 오순절을 맞아 룻기를 주목하고 또 룻기 중에서 보아스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 안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생 라합은 분명 배신자입니다.

배신자 중에 배신자이지요.

하지만 불의한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기생 라합은 경계선이 없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사람 라합에게서 보아스가 태어났고, 보아스 역시 이방인이라는 경계선을 넘어 모압 여인 룻을 통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 역시 장자권이라는 경계선을 넘어 다윗을 낳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눈에 들어옵니까?

경계선을 넘어 임하는 하나님의 자비.

그 긍휼하심이 눈에 꼭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모든 경계선을 허물었던 증거 곧 각 나라의 말을 하는 방언의 역사가 나타났던 오순절 성령 강림을 희망하고 노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