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드려야할 예배
레위기 1:1-9절 2016/4/17(일)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1:4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1:5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1:6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1:7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1:8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1:9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릴 수 있는 가장 선한 일, 가장 귀한 행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예배(禮拜)’일 것입니다.
‘예배’
구약성서에서 예배로 번역될 수 있는 대표적인 히브리어는 두 가지입니다.
'샤하'라는 단어와 '아보다'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 둘 다 그냥 예배라고 번역 할 수 있지만 그 쓰임새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예배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동사 '샤하'는 '엎드려 절하다, 굴복하다, 경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반면 히브리어 동사 '아보다'는 '봉사하다, 섬긴다, 봉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경배의 행위와 그리고 자신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드리는 봉헌의 행위가 핵심적인 요소가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이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염두 해 두고 주일예배 순서를 디자인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경배의 행위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봉헌의 행위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기본 폼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배의 두 핵심인 경배의 행위와 봉헌의 행위가 점점 현대교회에서 약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목회자의 설교가 예배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마땅히 드려야할 책임인 경배 곧 찬양의 행위와 봉헌의 행위를 무시하고 오직 설교만 들으려고 합니다.
설교가 곧 예배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니 예배, 계속 늦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일 예배는 9시와 11시입니다.
그리고 오후예배는 1시 30분 그리고 수요예배 7시 금요기도회는 9시 30분입니다.
예배의 한 축인 경배와 찬양은 주로 예배 순서 앞부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계속 놓칩니다.
목회자로서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예배가 너무 많아서 그런지 특히, 주일예배, 주일오후예배 그리고 금요기도회를 보면 예배의 한 축인 경배와 찬양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이 부분을 놓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간절한 마음이 경배인데 이것을 계속 놓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배가 역동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준비된 마음, 간절한 마음, 절박한 마음, 엎드려 굴복하는 마음, 그 경배와 찬양의 마음이 없는데 어찌 예배가 은혜롭고 역동적일 수 있겠습니까?
제발 부탁드립니다.
늦지 마십시오.
또 하나 예배에 임하는 우리가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먼저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배에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교회에 나오거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의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깁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능동적 행위가 있어야 예배가 가능한 것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타 종교와 달리 인격적인 하나님과 만나는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우선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반드시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죄인 된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임하지 않고는 참다운 예배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쯤에서 제가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예배의 자리, 기대와 설렘으로 오시는지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오시는지?
그것이 아주 궁급합니다.
어떻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유야 어떠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 이 예배에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죄인 된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부르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부르심에 대한 그리고 은혜의 대한 응답이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레위기 1장입니다.
레위기의 서두입니다.
그런데 레위기의 배경이 되는 출애굽기의 마지막을 보면 아주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입니다.
40:33 그는 또 성막과 제단 주위 뜰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휘장을 다니라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한 그 모든 일을 마치자 주님의 영광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차게 됩니다.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구름의 형상으로 임재 한 것입니다.
이 기이한 광경을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지만 주님의 영광이 회막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찬 것을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직접 다 목격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거룩했던지, 그 거룩한 곳으로 모세조차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말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직접 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모세조차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누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레위기의 첫 대목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회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을 때, 심지어 모세마저 그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을 때, 그 때 하나님이 누구를 부르는가 하면 모세를 부르십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바로 이 부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 한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실 때입니다.
자칫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선재적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그 거룩하신 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영역과 시공에 지배받는 인간의 영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과 육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세속적 영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아래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율법의 핵심인 제사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사실 우리에게는 낯선 용어입니다.
제사를 예배로 대체한 우리들로서는 레위기에 등장하는 5가지의 제사법이 아주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재미도 없고 사실 읽어도 무슨 말인지도 잘 모릅니다.
용어도 낯설고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알고 있는 유교식 제사법과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의 방법은 5가지입니다.
보통 5대 제사라고 말합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용어도 낯설고 규정도 까다롭고 그리고 거의 비슷한 내용들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지루합니다.
하지만 건너뛰고 싶은 그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레위기의 제사법이 바로 그런 경우인데 찬찬히 읽다 보면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혹,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물 곧 제물에 관한 규정입니다.
어떠한 제사의 방법이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원칙은 누구든지 간에 예물 곧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심지어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꼭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제사의 성격에 따라 제물의 종류나 제물을 바치는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에게 바칠 예물, 곧 희생의 제물을 생략하는 법은 없습니다.
히브리 단어 중에 '코르반'(qorba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보셨습니까?
신약성서에서도 나오는 단어입니다.
마가복음 7장 11절에서 예수님이 딱 한번 사용하십니다.
‘코르반’, 무슨 뜻입니까?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우리가 ‘코르반’이라고 부릅니다.
코르반.
원래의 의미는 '가까움' 이나 혹은 '사이가 가까움을 나타내는 물건'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해병대 반지처럼.
그런데 이 코르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표시하고 친교를 표시하는 증거물로서 그 뜻이 확대되게 됩니다.
그래서 ‘코르반’ 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일컷는 말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교를 나타내는 증표, 증거물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물, 코르반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친교를 나타내는 증거, 그 증표의 코르반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증표가 있어야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처럼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 곧 살아 있는 코르반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 예배, 진정한 예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코르반, ‘몸의 예배’입니다.
코르반과 관련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코르반의 명사형 어근이 케렙(qereb)입니다.
우리가 이 ‘케렙’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는 이유는 인간의 내장(심장 간 대장 소장 등)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이 케렙이 인간의 지,정,의를 뜻하는 말로도 확대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참된 예배와 관련해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코르반’이란 그냥 물건이나 그냥 돈이 아닙니다.
마치 자신의 심장과 간과 창자와 같이 자신의 속 전부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정의’ 곧 마음과 뜻과 힘을 전부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 전체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냥 멀뚱멀뚱, 혼곤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5대 제사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번제燔祭(holocaust)에 대해서만 잠시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번제’.
제물(곧 코르반) 전체를 불에 살라 바치는 제사를 말합니다.
제물을 통째로 태워 살라 바치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여호와의 제사 방법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법입니다.
번제에 사용되는 제물에는 주로 소나 양이 사용됩니다.
여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반드시 흠이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소를 받치는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번제를 드리려는 사람은 제물(코르반)을 이끌고 회막 어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4절의 말씀처럼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 손을 얹습니다.
이것을 안수라고 하는데, 자기 죄를 제물에게 전가한다는 상징행위입니다.
이것이 훗날 교회에서는 안수기도라는 축복의 상징행위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됩니다.
손을 얹은 봉헌 자는 자기 삶을 돌아보겠지요.
자기의 허물과 죄가 주마등처럼 스쳐갈 것입니다.
어쩌면 부끄럽고 참담한 마음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손을 얹는 의례가 끝난 후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짐승을 직접 잡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 대신 잡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물의 숨을 거둔다는 것.
자신을 대신해서 그 희생의 제물을 잡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본인의 몫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대행이 없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물을 드리는 봉헌자로부터 제물의 피를 받습니다.
그리고 받은 피를 회막(성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희생제물의 피를 뿌립니다.
그리고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이 번제물의 가죽을 직접 벗기고, 고기를 저며 놓으면 제사장은 그것을 가져가 제단 위에서 통째로 다 태웁니다.
또 봉헌 자가 내장과 다리를 물에 씻어 주면, 제사장은 그것 역시 제단 위에서 다 살라 바칩니다.
이렇게 제물(코르반)을 전부 불살라 받치는 제사가 번제입니다.
제사 중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처럼 예배자인 우리 자신이 코르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부를 태워 받치는 제물, 코르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아까움이나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회복할 합당한 예배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사야 1장을 보겠습니다.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참된 예배를 상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여러분 참된 ‘코르반’ 제물이 되어서 참된 예배를 회복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두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첫째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악한 행실을 버리고 행악을 그치십시오.
16절을 다시 읽는데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16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두 번째, 선향 곧 옳은 일을 배우고 정의를 찾으십시오.
역시 17절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17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이것이 참된 예배의 완성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예배당 뜰만 밟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이 코르반이 되어서 참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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