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고린도전서15:31-34 날마다 죽습니다

心貧者 2016. 2. 20. 10:33

날마다 죽습니다
고린도전서15:31-34절                                  2016/2/12(금)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15: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봄비가 제법내리는 밤입니다.
긴 설 연휴였는데, 어떻게 잘 보내셨습니까?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엊그제 수요일이 교회력으로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르는 사순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순절, 많이 들어보셨지요?
부활절을 기준으로 주일을 뺀 40일간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것을 우리가 사순절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우리가 주로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체적 본능 3가지를 부인하며 덜어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첫째, 육신의 정욕(새, 육체의 욕망/공, 육체의 쾌락)
둘째, 안목의 정욕(새, 눈의 욕망/공, 눈의 쾌락)
셋째, 이생의 자랑(새,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 재산(돈) 자랑)

그래서 이런 것들을 덜어내는 절제의 삶을 사순절기간 동안 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 특히 먹는 본능을 덜어 낸다든지 금식이지요, 자기 재산을 쌓는 본능을 덜어낸다든지 구제이지요, 그리고 눈의 욕망을 덜어낸다든지 기도생활입니다.
이런 것들을 부인하고 덜어냄을 통하여 40일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을 우리가 사순절 경건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태함의 본능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변화와 갱신을 갈망하지 않는 나태함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매너리즘이란 틀에 박힌 태도나 행동방식을 말합니다.
어떠한 변화도 어떠한 갱신도 갈망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 사순절 기간 여러분과 함께 덜어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 가운데 우리가 깊이 있게 묵상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태만의 본능’입니다.
특히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일수록 ‘나태함’과 ‘게으름’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따스한 봄날에 잠시 찾아온 춘곤증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태함’ ‘게으름’이 죄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태만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의욕과 활기를 잃게 해서 결국에는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심령과 그리고 육체를 점점 병들어 가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만의 본능을 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죄로 단정 짓습니다.

태만을 헬라어로는 ‘아케디아akedia’라고 합니다.
‘관심’을 뜻하는 ‘케도스kedos’와 ‘없다’는 뜻의 ‘아a’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케디아’란 말은 자기와 관련된, 그리고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빼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주님의 몸 된 교회에, 그리고 우리의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을 쓰지 않는 상태를 ‘아케디아akedia’ 태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죄이지요.

제가 왜 이것을 사순절이 시작하는 시점에 말씀드리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아케디아akedia’ 태만의 본능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죄인지도 모르고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는 정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많습니다.
스포츠, 연예계, 정치계 할 것 없이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에는 교회의 일에는‘아케디아akedia’, ‘관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교인으로서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아주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람 목숨은 하나입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목숨이 여러 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자로서 단언하건데 ‘나는 날마다 죽노라’

여기서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자로서 날마다 죽은 것이 무엇일까요?
고집스러운 못된 성질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 좀 과장되게 말한 것일까요?

여기서 바울이 단언하며 말한 죽음이란 실재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자아, 자기 의, 자기 욕심이 실제적으로 죽는 것을 말합니다.
성질 조금 죽이고 자존심 조금 굽히는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만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평생동안 싸운 것이 영적 태만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동족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태만과 싸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안다고 한 유대인들이 영적 태만에 빠져 하나님의 복음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 동족 유대인의 영적 태만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헌신하고 또 헌신한 사람입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구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고,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고,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때로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위험 속으로 뛰어든 것은 오직 하나 동족인 유대인들의 영적 태만을 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아케디아akedia’라는 태만의 죄로부터, 무관심의 죄로부터 동족 유대인들이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말만 하나님이지 욕망이라는 불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들을 건져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방까지 연기가 차올랐는데도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이들을 살려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드러나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 목숨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자기 자신을 빚진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 사랑의 빚 진자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는 갚을 길 없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을 다 바쳐 예수님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혼신의 힘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은 아주 단순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입니다.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인생 헛된 일이나 욕망에 바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고린도전서 6장 20절 말씀에 주목해야합니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
이것이 가치 있는 삶이고 이것이 사람다운 삶입니다.
그러니 그 가치 있는 삶의 출발점인 예배의 자리를 목숨 걸고 사수하십시오.
예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는 각오가 설 때 예배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태함에 빠져있는 오늘 우리에게 바울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15: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15:33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15:34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나쁜 동무’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유도하는 이를 일컫는 말일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속지 말고 지금 나는 누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 하십시오?
주님인지, 아니면 세상인지, 죄의 습관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