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히 행하고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장11-14절 2016/2/24(수)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느 시대나 어느 때나 성령을 모신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처음 임한 2000전이나 현재의 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이나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늘 한 가지의 소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종말 의식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 곧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웠다는 종말의식입니다.
찬송가 179장입니다.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저 천국을 얻을 자 회개하라
주 성령도 너희를 부르시고
뭇 천사도 나와서 영접하네
바로 이 종말신앙입니다.
좀 다른 말로 표현 하면 종말에 대한 늘 위기의식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사도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웠다’라는 종말론적인 위식의식 속에서 동족과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도의 열정과 선교의 열정이 생겨났고, 그 열정의 터 위에서 교회가 이 땅에 곳곳에서 세워진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의 신앙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 곳 저 곳에 만들었고 새롭게 형성된 종말공동체, 신앙공동체는 이 땅에 교회의 형태로 곳곳마다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웠다’라는 종말론적인 위식의식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11절입니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당시 바울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긴박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니 100년 200년 가는 어마어마한 예배당 건축, 100억 1000억이 들어가는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 건축, 그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마치 교회의 지상 목표처럼 되어버린 예배당 건축이 바울 서신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위해 평생을 보낸 사도 바울이지만 그 어디에도 예배당을 짓고 봉헌예배를 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웠다’라는 종말론적인 위식의식 속에서 복음 전도의 열정만을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뿐만 아니라 오늘날 부름 받음 목회자도 찬송가 323장의 노랫말처럼 어디든지 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번듯한 예배당이 없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는 것입니다.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이 왔다’라는 종말의 신앙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충성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이 끝이고, 오늘이 마지막이고, 오늘 우리의 세대가 마지막, 종말의 때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나태하거나 게으름 피지 않고 깨어 부지런히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몫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2000년에 살았던 사도들이나 교부들이나 중세 신앙인들이나 17-18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살았던 신앙인들이나 오늘날 현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나 다 적용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말신앙이 가지고 있는 현실의 모순 또한 보게 됩니다.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이 왔다’라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사도시대나 교부시대나 중세시대나 종교 개혁시대나 그리고 오늘날 현대까지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그리스도의 강림은 이 땅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의 모순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이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2000년이 지나도록 이 말만 되풀이되고 있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의 모순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이렇게 논리적인 모순이 어디 있는가?’
‘시대 시대마다 종말이라고 하면 이미 종말이 왔어야지 언제까지 종말타령만 할 것인가? 종말이 정말 오기는 오는 것인가? 그리고 언제 오는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합리적인 의심이지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한다면 이미 사도가 죽기 전에 왔어야지요.
마태복음 16장입니다
마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처럼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한 말을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물론 모순이지요.
시간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분명 모순입니다.
시간 속에, 역사 속에 갇힌 우리에게는 명백한 모순입니다.
하지만 시간 위에 있는 하나님에게는 요.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처음과 나중이 되시고 천년이 하루와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시간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라는 이 종말의 약속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지나가는 말이지만 1992년 다ㅁ선교회처럼 그리고 오늘날 신ㅊ지처럼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주장이 위험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 물리적인 시간을 종말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종말이란 물리적인 시간을 넘는 시간 곧 영원의 시간, 구원의 시간, 하나님의 때임을 우리가 먼저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넘는 시간 곧 영원의 시간, 구원의 시간,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시간이 육신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정해 놓은 종말의 시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종말의 때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영원의 시간이지만 육체를 입은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다시 설명합니다.
종말이라는 하나님의 때,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을 넘는 시간 곧 영원의 시간, 구원의 시간이지만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곧 죽음 앞에 서 있는 인생들에게는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마지막 구원의 기회, 마지막 물리적인 시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각 시대마다 각 사람마다 마지막 구원의 때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의 때, 종말을 말할 때마다 항상 우리에게 물리적으로 마지막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이 없다는 위기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올해 대학입시 실패하면 다음에 하면 됩니다.
올해 취직을 실패하면 다음에 준비 잘해서 도전하면 됩니다.
결혼 실패하면 다시하면 됩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구원의 때는 이생에서 놓치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종말의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을 주면서 하는 권면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다시 1절입니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구원의 때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 왔으니 그 시기를 분별하고 잠자듯 한 나태란 삶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잠이 오면 어떻습니까?
아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직 잠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잠에 취한 사람은 시기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제일 먼저 말하는 것이 깊은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맑은 정신을 가지고 구원의 때를 분별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장 2절입니다.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바울이 만한 영혼의 잠에서 깨어난 삶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12장 1절이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처럼 죽은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을 산체로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말의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둠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 구원의 날은 빛의 영광으로 가득한 날을 말합니다.
따라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하나님의 때, 구원의 날 즉 빛의 영광으로 가득한 날이 가까웠으니 어둠의 일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버려야할 어둠의 일이란 무엇이고 우리가 입어야할 빛의 갑옷은 무엇일까요?
그 내용이 13절과 14절에 나옵니다.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13: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자, 우리가 버려야할 어둠의 일 무엇이 있습니까?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등 곧 자기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 번역에 따르면,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 따르면,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입어야할 빛의 옷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그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새 번역에 따르면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 따르면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떻습니까?
종말의 때,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는 위기의식을 가기고 살아가십니까?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십니까?
긴장하며 깨어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바울의 말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위기의식도 없고 긴장도 없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방임하며 살아간다면 그 자가 바로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는 자, 곧 육신의 일만을 도모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권면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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