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4:12-17 아파하는 사랑에 응답하라

心貧者 2016. 2. 23. 10:54


아파하는 사랑에 응답하라

마태복음 4:12-172016/2/21(주일오후)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성경의 내용 전체를 한 두 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계시 된 성경 66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한결같고 명백합니다.

무엇일 것 같습니까?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무엇이겠습니까?

자비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의 상처로 인해 아파하고 신음하는 우리를 향한 그리고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여호와)’인 것입니다.

야훼란 계시는 분이라는 뜻인데,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죄와 악으로부터 친히 건져주신 분.

스스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여기에 한 가지 주제를 더 덧붙이자면 그 사랑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이들의 또 다른 사랑입니다.

사랑의 확산이지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사람이 되어서 정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확산입니다.

어쩌면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그 두 가지 사랑에 대한 다양한 변주곡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들 그리고 고통 받는 이들을 짠하게 바라보시는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아들을 짠하게 바라보시는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살 권리와 함께 행복할 권리를 되찾도록 인간사에 개입하신 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가난한 우리가 멸시 천대를 벗어나 행복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아파하는 우리가 상처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바로 구원(Savior)이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구원받으셨습니까?

행복하십니까?

정말 기쁨이 충만합니까?

만일 이것이 내 안에 따스한 공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신앙의 길, 이 믿음의 길을 다시 한 번 꼭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탄이 주는 거짓 구원에 놀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주는 세 가지 시험처럼 빵이라는 거짓 구원, 자기 과시라는 거짓 구원, 자기 권세라는 거짓 구원에 나도 모르게 놀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아파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역사라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드러난 본문 중에 하나입니다.

12절과 13절입니다.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 예수님이 새롭게 정착한 곳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갈릴리 가버나움입니다.

이곳이 예수님의 새로운 거주지가 될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가버나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는 제법 큰 어촌마을입니다.

우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가버나움은 오늘 본문 13절의 말씀처럼 여호수아시대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에게 분배된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전 732년 거대 제국 앗시리아에게 북이스라엘이 침공 당하게 되자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는 앗시라아인들의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빈 땅에 수많은 이방인들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별명이 15이방의 갈릴리입니다.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이처럼 가버나움은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땅처럼 방치되고 잊혀졌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시대 가버나움에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방의 갈릴리 가버나움이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는 기회의 땅이 된 것입니다.

저 북쪽 다메섹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이사랴를 거쳐 저 아래 애굽까지 이르는 해변 무역 도로(via maris)가 지나가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사람도 모이고 돈도 모이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갈릴리 호수 중에서도 제법 물고기가 많이 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물고기 훈제 가공 산업도 발달해서 도시가 아닌 어촌임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걷는 세관도 있었고, 치안을 담당하는 로마군의 수비대도 주둔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 바로 가버나움을 관할하는 로마군 수비대 대장이었습니다.

 

그런 가버나움이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제법 도는 마을이 되자, 불행하게도 가버나움은 수탈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곡창지대였던 호남이 수탈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가버나움도 권력자들의 배를 채우는 곳간으로 전략한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 분봉 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에게 막대한 세금명목으로 돈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군인들에게도 보호비 면목으로 시도 때도 없이 수탈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돈을 벌면 뭐합니까?

재미가 없지요.

오히려 더 형편이 어려지고 비참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로 우리 주님이 이사를 간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주체인 고통 받는 이들을 짠하게 바라보시는 아파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 주님이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신 것입니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15-16절입니다.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태의 설명에 따르면 가버나움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역사, 구원의 역사입니다.

 

드디어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회복된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첫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17절입니다.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설교의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회개하라입니다.

Repent, 경솔한 행동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설교의 내용은 마지막 예언자 세례요한의 설교 내용과도 동일합니다.

31-2절입니다.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러면 우리가 왜 회개해야 할까요?

왜 세례요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회개하라는 말 다음에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누구로 인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말을 마태는 현재 완료형으로 맺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앞으로 올 것이다. 미래형이 아닙니다.

, 올 줄도 모른다. 가정법도 아닙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현재 완료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천국 앞에서 우리가 행동해야할 회개란 무엇일까요?

돌이킴입니다.

Repent, 하나님 없는 자처럼 살았던 우리의 경솔함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는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아파하는 사랑의 행동이 구원이라면, 그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사람의 책임 있는 행동이 바로 회개라는 말입니다.

곧 아파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 회개라는 말입니다.

 

찬송가 280장입니다.

1.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2. 전부터 계신 주께서 영죽을 죄인을

보혈로 구해 주시니 그 사랑 한 없네.

3. 나 예수 의지함으로 큰 권능 받아서

주님께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후렴>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그 아파하는 사랑)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그 응답이 회개이다.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서 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왔던 삶에서 하나님을 마주보며 사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나만 이해해 달라고 징징거리는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 마음을 품고 다른 이들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살기로 다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나눠 먹는 것입니다.

원수라 할지라도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외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 돼지에게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할지라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길이라면 거기에 인생 전부를 거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 특히 거짓 선지자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행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은 누군가를 강압하여 자기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정한 것 이외에 더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자기의 죄와 무능 그리고 비참한 형편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엎드려 아뢰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를 처서 갚아주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의 말처럼 우리의 돈 지갑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래야 이전과 다른 삶, 곧 천국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 모순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느 것 하나 정상이 없습니다.

흑암에 앉은 자처럼, 그늘에 앉은 자처럼 다 미쳐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잃고 기쁨을 잃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계시하는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가버나움처럼 아파하는 곳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오늘도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도 아파하는 우리에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흑암의 땅으로 그늘진 곳으로 흐르고 또 흐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신음 하는 자리에 그 흑암의 자리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파하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그리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정한 회개로 응답하십시오.

이제 우리가 회개의 합당한 삶으로 아파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차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 주님이 주시는 행복의 길, 기쁨의 길이 우리에게도 열리지 않겠습니까?

 

사순절 둘째 주간입니다.

이 순례의 여정 속에서 다시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