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굳게 합시다
골로새서 2:6-7절 2016/2/26(금)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상투적인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번 주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주님이 주신 말씀 안에서 살려고 치열한 몸부림을 치셨는지요?
상투적인 질문 같습니다만 사실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늘 이런 질문 앞에서 솔직해 지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살려고 애를 썼는지,
주님 안에 살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성령의 계획하심 속에 내 삶을 맡겨보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늘 내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개인의 신앙도 건강해 지고 우리 교회공동체의 신앙도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산다는 것,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이 사실 막연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또 어떻게 하는 것이 말씀 안에서의 바른 삶일까?’
사실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저는 이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늘 주님과 접촉할 수 있는 것들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선 손에 잡히는 곳에 말씀을 둡니다.
여러 번역서의 성경이나 신앙 서적을 손에 잡히는 곳에 두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반드시 정해놓은 기도 시간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새벽기도가 바로 그 시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주일예배에 제 모든 것의 기준을 맞춥니다.
이것이 제가 스스로 하는 신앙의 훈련입니다.
물론 주님과의 접촉점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과의 접촉을 중지해야 합니다.
우선 TV, 인터넷, 그리고 스마트 폰과 같은 문명의 이기와의 단절이 필요합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하지만 가능하면 그것들과의 접촉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담이지만 혹 저에게 안식년이 주어진다면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서 일정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수도원이 정한 성무일과(聖務日課, Officium Divinum)에 따라 매일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노동함으로 기도의 근육, 말씀의 근육, 그리고 사랑의 근육을 다시 단련하고 싶습니다.
갓 부대에 입소한 훈련병처럼 다시 신앙의 훈련을 기초부터 받고 싶습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이 그리고 우리 교회공동체가 건강해 지기 위해서는 영성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건강한 육체를 위해 운동과 같은 훈련이 필요하듯 건강한 영성을 위해서는 신앙의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받아야할 신앙의 훈련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경건의 훈련입니다.
말씀 훈련, 기도훈련, 예배 훈련, 헌금 훈련
둘째는 사랑의 훈련입니다.
전도 훈련, 봉사 훈련, 공동체 훈련
지금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훈련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말합니다.
교회가 빡세지 않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처럼 빡센 신앙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도 빡세게 하고, 말씀도 빡세게 배우고, 전도도 빡세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 맞습니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훈련을 받는 자로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참여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 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가 정한 프로그램만으로도 신앙 훈련, 충분이 빡셉니다.
우리가 약속한 예배 시간이나 봉사 시간 그리고 전도 시간만이라도 잘 활용하면 기도 훈련, 말씀 훈련, 예배 훈련, 전도 훈련, 봉사 훈련 충분이 빡세게 받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통 아이들을 훈육할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아주 어릴 때는 먹는 것이나 장난감으로 달랩니다.
조금 커서 말 귀가 알아들으면 ‘이놈’ 하면 됩니다.
그런데 장성하면요?
중요한 것은 훈련을 참여하는 이의 자발성과 창조성입니다.
교회가 마련한 신앙 훈련의 장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땀을 흘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세상 속에서 창조적 삶을 살아 보는 것입니다.
교회의 정한 기도의 장에서 기도 훈련 받고, 말씀의 장에서 말씀 훈련 받는 일에 게으름 피지 않는 것입니다.
‘크레도credo’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레도credo’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사용되는 단어가 ‘크레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도가 전해 준 크레도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도신경(어퍼설스 크레도 Apostles Creed)입니다.
사도신경 원문은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라틴어 원문에 보면 Credo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믿습니다’ 라는 단어가 우리말 번역에는 네 번 나오지만 라틴어 원문에는 두 번만 나옵니다.
첫 번째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사도 신경 전체 서론에서 한 번 나옵니다.
라틴어 원어로 옮기면 ‘크레도 인 데움 파트렘 옴니포텐템 / 크레아토렘 첼리 에트 테래’입니다.
그 다음은 사도 신경 12개 신조 중에서 8번째 해당하는 신조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사시도신경에 등장하는 12개의 신조.
1)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2)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3)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4)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5)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6)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7)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8)성령을 믿사오며
9)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0)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11)몸이 다시 사는 것과
12)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크레도’,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은 ‘심장을 바친다’는 뜻의 ‘코르도’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마다 사도들이 전한 ‘크레도’ 즉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감정보다 더 깊은 생명의 중심 곧 우리의 심장을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 예배를 시작한다는 말은 어머 어마하게 무서운 표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심장을 내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심장을 내 줄 수 없는 일이기에 신앙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의 훈련을 잘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달라스 윌라드라는 분은 ‘크레도’, 믿는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는다(크레도)는 말이나 믿는다는 확신만으로는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행동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다."(게리 하우겐, <정의를 위한 용기>, IVP, p. 78ff)
그렇습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크레도credo’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 행동으로 옮길 때 비로소 ‘나는 믿습니다’라는 ‘크레도credo’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 심장에서 나오는 자발적 신앙 고백입니다.
‘크레도’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을 시인하면서도 삶으로는 주님을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과 현실의 삶, 그 간격이 너무 크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 주목해야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 전부를, 우리의 인격 전부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 신앙의 고백과 현실의 삶의 간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은 이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까?
교회의 뿌리를 박으십시오.
그리고 교회 예배의 자리에 뿌리를 박으십시오.
한 가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박아 굳건한 믿음을 세우십시오.
시대의 흐름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할 수 있는 ‘크레도’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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