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로마서 5:1-5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心貧者 2015. 12. 6. 15:4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52015/12/6(주일)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오늘 우리는 교회력으로 강림절 두 번째 주일 예배로 모였습니다.

강림절.

우리가 잃어버린 신앙의 전통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강림절 금식입니다.

강림절 금식낯설지요

하지만 강림절 4주 동안 행했던 교회의 엄격한 금식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거룩한 일이었고 하나님을 모시는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전통이 우리 교회 안에서 어느덧 사라졌습니다.

사순절 금식만 더러 말하고 행하지, 강림절 금식을 말하거나 행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금식, 해 보셨나요?

왜 하셨나요?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하셨나요?

 

금식에 대한 바른 이해는 참 중요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대속죄일(Yom Kippur)에만 금식을 했습니다.

대속죄일이란 신년 축제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로부터 열흘 째 되는 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두 가지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면서 금식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한 금식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한 금식입니다.

지나 날 이웃들과 싸웠거나 갈등을 빚었던 모든 일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금식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그리고 괴로움을 금식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몇 가지 금식하는 날을 더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1차 침공을 당한 날.

예루살렘이 파괴된 날.

성전이 파괴된 날.

그리고 아히감의 아들 총독 그달리야가 살해당한 날들을 추가해서 금식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이스라엘의 패망과 관련된 날들입니다.

그들이 그 날에 금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거역한 삶이 얼마나 쓰라린, 얼마나 아픈 상처를 낳는지에 대한 기억차원에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금식은 전통적으로 부활절을 앞둔 사순절과 성탄절을 앞둔 강림절 때 주로 행하게 됩니다.

그냥 쉽게 강단보가 보라색일 때 금식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정결함입니다.

정결함을 통해 하나님이 거할 마음의 자리를 마련해 두는 차원에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금식, 40일 동안 완전 금식을 한 분도 더러 있지만, 보편적으로 감리교회의 창시자 웨슬리 목사님이 사용한 방법처럼 일주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3시까지 금식하는 것입니다.

어때요?

해 볼만 하지요.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우리의 삶을 단정하게 바로잡는 금식을 통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설렘과 기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24일까지 행하는 강림절 금식입니다.

연말 회식이 아니라 강림절 금식입니다.

 

강림절 금식.

우리의 삶을 단정하게 바로잡는 강림절 금식과 함께 이와 더불어서 우리가 행해야할 또 하나의 금식이 있습니다.

이웃과의 화목 곧 이 땅의 이루어져야 할 평화 샬롬을 위한 금식입니다.

이사야서 58장입니다.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모든 이들과의 화목과 평화를 누리는 상태를 성경은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58:6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58: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

이것이 이웃과의 화목 곧 이 땅의 이루어져야 할 평화 샬롬을 위한 금식입니다.

여러분이 행하는 사랑의 빵이 그 첫 걸음이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죄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보다 하나님의 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 것입니다.

. 의리

곧 관계회복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를 관계 곧 의롭게 되는 일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곧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입니다.

51절입니다.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이것을 우리가 전문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부릅니다.

전혀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판단해 보십니다.

의롭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깨끗하고 진실합니까?

사실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거짓과 불의를 볼 때, 다 심판의 대상이고 다 멸망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은총 십자가와 죄와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을 통해 죄인 되었던 우리가 의롭다 하심칭의를 얻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424-25절입니다.(새번역)

4: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직도 옛 삶의 습관들 즉 불의하고 거짓된 삶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존재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곧 칭의 사람은 이 땅에서 어떤 삶, 어떤 인생의 사명을 감당해야하는가?

바울의 제안입니다.

다시 1절인데 후반부에 주목합니다.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화평 곧 평화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화평이고 둘째는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칭의 사람이 풀어야할 인생의 숙제인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이고 또 하나는 사람과의 화평입니다.

문제는 이 일, 이 사명을 이루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은 예배를 통해 그리고 경건의 생활을 통해 그나마 시도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람과의 화평, 특히 원수와 같은(가시와 같은) 이웃과의 화평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과의 화평을 로마서 4-8장에서 맛보기로 먼저 다른 후에 9장 이후에서는 본격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비롯한 세상 모든 사람들과의 화평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화평, 사람과의 화평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사람과의 화평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 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51절입니다.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바울은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우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님과의 화평, 어떻습니까?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십니까?

아니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왠지 껄끄럽고 불편하십니까?

만약 불편하다면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 왕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날 다윗은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동침한 것입니다.

그것도 벌건 대낮에 그런 짓을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하나님과 화평했겠습니까?

아니면 불편했겠습니까?

불편하지요.

몹시 불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숨기기 위해 다윗이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됩니다.

동침한 여인의 남편, 우리아 장군을 죽인 것입니다.

간음을 감추려다 살인까지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지요.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제 다윗이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를 털고 화평을 누리게 되는 줄 아십니까?

바로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통회할 때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다시 용납하시고 이전과 같은 화평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 일이 얼마나 하나님께 고마웠던지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시편 321-5절에 이렇게 남겨 놓습니다.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2: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32: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저는 다윗의 이 고백이 강림절 금식 앞에 서 있는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왜냐?

죄 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 하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은혜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뿐만 아니라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고난 속에서도 부끄럽지 않고 즐거움으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지금 당하는 그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부끄럽지 않고, 즐거움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성령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입니다. 믿어지십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누가복음 2장을 찾아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 주님의 오심을 누가는 이렇게 묘사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11-14절입니다.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2: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찬양하면서 한말 이것입니다.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의 오심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곧 우리의 평화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늘의 영광이 곧 땅의 평화가 되고 땅의 평화가 곧 하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과의 화평을 소망하십시오.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믿음의 힘으로 사람과의 화평, 원수와 같은(가시와 같은) 이웃과의 화평을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기 위해 힘쓰시고 또 힘쓰십시오.

예배에 힘쓰시고 경건생활의 힘쓰십시오.

그래야 우리 주님이 이 땅 이유가 우리에게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