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예수
마태복음 1:18-25절 2015/12/13(주일)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성탄절이 곧 다가오고 있습니다.
10여일이 지나면 우리 주님이 오신 성탄절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성탄절 기대가 되십니까?
기대가 되신다면 그 기대가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있는지요?
‘기대’와 ‘기다림’
기대, 소망이겠지요. 기다림, 인내일 것입니다.
소망과 인내, 인내와 소망
이것이 강림절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가짐, 몸가짐입니다.
‘도전 골든 벨’처럼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해마다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은 일 년 중 어둠이 가장 짙고 밤이 가장 길다고 하는 이 날을 지나야만 맞이할 수 있는 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날은 우리나라 24절기 중 어느 날을 말합니까?”
동지(冬至)입니다.
흥미롭지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를 지나야만 맞이할 수 있는 날이 성탄절이라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조선 후기 대표적 목민관이셨던 정약용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정학유선생님입니다.
이 분이 농민들을 위해 농사와 관련된 아주 쉬운 노래 책 하나를 만들게 됩니다.
그 책의 이름이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입니다.
구전되어 온 세시풍습을 정리한 노래집이 농가월령가인데 거기에 보면 동지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冬至는 名日(명일/명절)이라 一陽이 生하도다.”
여기서 ‘일양’이라고 하는 것은 ‘한 빛’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고, 또는 ‘한 햇살’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지는 한 빛, 한 줌의 햇살이 生,나타나는 명절이라는 뜻이 됩니다.
비록 일 년 중 어둠이 가장 짙고 밤이 가장 긴 동지이지만 그 동지 안에는 만물의 생명을 소생케 하는 한 빛, 한 줌의 햇살이 희망으로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동지와 성탄절.
그 의미를 이렇게 풀어보면 어떨까요?
동지가 지나야만 성탄절이 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동지 안에 숨어 있는 한 빛, 한 줌의 햇살은 우리에게 누구를 빗대어 하는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그리스어로는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이 땅의 어두움을 비추는 한 빛, 한 줌의 햇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1장 9절입니다.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한은 말합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누구인가?
그분이 바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생명의 빛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의 시대에 흑암을 밝히는 참 빛, 생명의 빛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이 말하는 태초의 빛.
그 생명의 빛을 스스로 품고 있는 분이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빛의 절기입니다.
그래서인가요?
해 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예배당과 성당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제법 모이는 곳에는 예외 없이 빛의 조형물들이 화려한 빛을 내뿜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한 해를 살면서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새 해에는 새 빛을 가슴 가득 맞이하자는 취지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해서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화려한 거리의 빛만큼 세상이 밝아지고 또 내 인생도 화려해 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빛에 대하여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빛이 밝혀져야 하는 것은 어두운 거리가 아니라 어두운 세상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기쁨과 감사가 없는 우리 자신, 우리의 내면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마음입니다.
동지와 성탄절.
두 가지 풍습에서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동지나 성탄절이나 나만의 축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축제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의 차별도 없고 이념의 차별도 없고 종교의 차별도 없는, 그 어떤 차별과 경계가 용납되지 않는 모든 이들의 잔치가 바로 성탄절입니다.
농가월령가를 보면 동지 절기의 세시풍속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時食으로 팥죽 쑤어 隣里(인리: 이웃에 있는 마을)와 즐기리라”
동지 날 먹는 것이 팥죽입니다.
팥죽은 쑤어 혼자 먹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눠먹는 것이지요.
우리 식구 우리 마을 뿐만 아니라 隣里(인리: 이웃에 있는 마을)과 함께 즐기는 것
우리끼리라는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함께 즐기는 것이 동지 팥죽입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탄의 예배와 축제, 이 기쁨의 예배와 축제는 나만 즐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끼리 즐겨서도 안 됩니다.
성탄의 예배와 축제, 이 기쁨의 예배와 축제는 교회 울타리 밖 세상의 이웃과도 함께 즐기는 예배와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우리에게 가시와 같은 이웃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예배와 축제가 바로 성탄절입니다.
강림절, 해 마다 강림절이 되면 교회는 강단을 보라색으로 치장을 합니다.
강림절의 고유색이 사순절과 같은 보라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단도 보라색, 기다림 초도 보라색, 목회자의 스톨(영대, 목에 두르는 띠)도 보라색입니다.
보라색, 어떻게 만들어 집니까?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이 섞인 색입니다.
동양에서 빨강은 하늘을 상징하고, 파랑은 땅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강림절의 보라색은 하늘과 땅의 만남, 하늘과 땅의 소통을 상징합니다.
이 만남과 소통을 상징하는 강림절이 지나야 성탄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늘 곧 하나님과의 만남 그리고 땅 곧 이웃과의 소통이 없이는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맞이한 성탄절은 어떠한 차별도 어떠한 경계도 없는 우리 모두의 축제가 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 예수님을 경배하는 성탄절입니다.
그러면 성탄절이 예수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교회 밖 경계 넘어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merry, 기쁨이 되는 날일까?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속죄입니다.
대속의 은혜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구약의 예언자가 언급한 메시야의 이름을 뭐라고 지으라고 합니까?
‘예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예’ ‘여’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야훼)의 축약형을 포함하고 있는 이름으로 그 뜻은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신다.’입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입니까?
‘그들의 죄에서’ 구원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탐욕의 죄, 불의함의 죄, 사망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 곧 자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이 예수이고, 그 분이 오신 날이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구원의 길, 죄 사함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어디에 계셔야 마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 이상의 하늘 위 하늘 입니다.
감히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고 근접할 수도 없는 그 곳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보좌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텐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임마누엘.
그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God-(is)-with-us)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우리 삶의 자리와는 무관한 저 편에 초월하여 계신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 그것도 아주 깊숙이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말구유처럼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이 삶의 밑바닥에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고통의 올무에서 자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메리, 기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 중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뿐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를 우리가 반복해서 읽다보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강조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마태가 들려주는 성탄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와 ‘임마누엘’,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인가?’라는 그 분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초점이 조금 다릅니다.
누가가 들려주는 성탄 이야기의 핵심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가 전한 첫 마디 말이 “기뻐하여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가 유대 산골에 살고 있던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도 기뻐서 뛰놀았다고 증거 합니다.
더 나아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두려워하는 목자들을 다독이면서 한 말 역시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2장 10절입니다.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기다려지십니까?
‘우리의 구세주’로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으로 기다려지십니까?
그리고 그 기다림이 큰 기쁨으로 다가오십니까?
큰 기쁨.
이것이 제가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권면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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