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남은 자
로마서 11장 1-10절 2015/11/18(수)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11: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11: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11:9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11:10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은 자기 자녀들을 교육할 때 늘 유념하는 교육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사고’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 항상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긍정적 능력을 늘 가르쳐 줍니다.
‘할 수 없어’가 아니라 ‘할 수 있어’ 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얘야, 얘야,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사울 때, 말이야 어마 어마하게 큰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어. “아니 우리가 어떻게 저 큰 거인을 물리칠 수 있어. 이 전쟁 틀렸어.” ’
하지만 어린 다윗은 골리앗을 보자마다 무슨 생각을 먼저 했는지 아니?
‘야, 덩치가 산만해서 눈 감도 던져도 물맷돌에 맞겠는 걸, 이 전쟁 이길 수 있어’
이처럼 같은 이야기지만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 다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자녀를 교육할 때 항상 긍정적인 사고, 긍정적인 해결점을 모색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똑같은 문제라 할지라도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민족보다 유대인들이 월등한 것입니다.
‘할 수 있다’라는 긍정적인 사고의 힘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도 어려서부터 이런 긍정적인 사고의 능력을 교육받으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 곧 자기 동족 유대인의 대한 구원을 오늘 본문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리스도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유대인의 구원.
하나님이 능히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 (그 다음에 다같이)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자기와 언약을 맺은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신의가 없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구원에 은총을 이스라엘에게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나도 유대인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구원하신 것처럼 반드시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신실하신 하나님이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1절 중간입니다.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내가 누구냐?
아브라함의 씨요, 베냐민지파 출신이다.
한 마디로 나도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어떤 사람이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멸시하고 죽이던 자가 아니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를 죽이는데 열심히 치면 나보다 더한 자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못된 것으로 치면 나 보다 더한 유대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 복음에 갇히 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복음 때문에 지금 내가 핍박과 능욕과 멸시를 당하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나 같은 골수분자 유대인을 구원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을 포기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제시한 첫 번째 증거입니다.
또 하나 제시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일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합 왕 시대입니다.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 할 수 없는 못된 짓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럼없이 행합니다.
특히,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땅에서 판을 치게 됩니다.
그러자 이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누구 입니까?
엘리야입니다.
그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을 하게 됩니다.
바알이 하나님 인지, 여호와가 하나님인지.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내기를 하게 됩니다.
누가 이깁니까?
엘리야가 이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의 목을 칩니다.
그러자 누가 반격에 나서는가 하면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 왕후가 반격에 나서 엘리야를 죽이려 합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현상금을 걸어 놓고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합니다.
그 때 유다에 속한 남쪽 끝 브엘세바를 지나 광야로 들어가 굴속에 숨어 지내던 엘리야가 지내면서 하나님에 푸념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3절입니다.
11: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이 말씀은 열왕기상 19장 9-10절 말씀을 바울이 재 인용한 것입니다.
찾아봅니다.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18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 몇 명을 남겨 두었다고 합니까?
칠천 명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때 유대인들은 불의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자처럼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예비한 동족 이스라엘이 반드시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7천이 될지 7만이 될지 70만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유대인 중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입기 위해 예비 된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그 구역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지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역사가 멈춘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시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1절 전반부입니다.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반드시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 이런 결론을 내입니다.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 받을 자가 있다, 없다?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자 7천명이 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기억할 것이 하나 있는 데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개입할 만한 가치 곧 착한 행실이나 선한 양심이라는 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11:7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택하심.
곧 남은 자입니다.
그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가 주는 교훈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바람이지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철저히 개인 구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동족을 향한 구원의 열정, 전도의 열정입니다.
다시 말해 아직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지 못한 자를 향한 뜨거운 복음 전도의 열정입니다.
즉, 남은 자를 찾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유대교 회당으로 끊임없이 발을 옮기는 동기가 됩니다.
동족으로부터 배신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당하고 있지만 남은 자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구원은 철저히 개인의 차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족을 향한 남은 자의 소망마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택함을 입지 못한 완악한 자들입니다.
11:7 그러면 무슨 결과가 생겼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찾던 것을 얻지 못하였지만,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완고해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악한 자란, 영적 감각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 마음에 굳은 삶이 배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8절과 9절 그리고 10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11:8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혼미한 영을 주셨으니, 오늘까지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11:9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걸려 넘어지고, 보복을 받게 하여 주십시오.
11:10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게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등이 언제나 굽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없다?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 밥상만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9절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완악한 자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아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남은 자’의 삶을 추구하십시오.
비록 그 길이 좁고 험난하다 할지라도 그 길을 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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