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잠언 12: 10-19 새로운 인생의 길, 의인

心貧者 2015. 11. 17. 10:48

새로운 인생의 길, 의인

잠언 12:10-192015/11/15(주일)

12:10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12:11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12:12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12:14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12:16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2:17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

12:18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12:19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늦가을입니다.

나뭇잎들이 제법 땅에 나뒹구는 것을 보면 늦가을은 늦가을입니다.

하늘만 바도 늦가을의 정취가 아주 물씬 풍깁니다.

늦가을.

어떤 분은 이 시기를 돌아감의 계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돌아감.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돌아감의 계절

가을과 겨울 사이의 계절을 사람들은 그렇게 부릅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만물은 무성히 자라나지만(夫物芸芸)

저마다 제 뿌리로 돌아간다(各復歸其根)

뿌리로 돌아감을 일러 고요함이라 하고(歸根曰靜)

그것을 일러 제 본성으로 돌아간 것이라 한다(是謂曰復命)"(노자 16)

 

여름내 무성함을 자랑했던 나뭇잎도 결국 그 뿌리인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치이지요.

자연의 이치, 세상의 이치, 생명의 이치입니다.

제 본성곧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노자는 고요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왜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자리로 잘 돌아가는 이들은 고요하지만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 이들은 늘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 고요하게, 그래서 노자는 말합니다.

뿌리로 돌아감을 일러 고요함이라 한다

 

히브리서 121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당시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놓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히브리기자는 이런 권면을 합니다.

고난, 너무 힘들지요.

하지만 고난의 무게가 버겁다고 하여 거기에 너무 매이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 받는 지금이 어느 때인지 그리고 고난 중에 임하시는 주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잘 생각해 보고 분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리판단하지 못하는 못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 곧 거룩함이라는 달음질을 참으면서 우리의 근본 자리인 하나님 나라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 이 믿음만 저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라는 것 곧 구원의 실상 나타날 것이요. 보지 못하는 것 곧 하나님 품에 다시 안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하는 고난이 멸망의 때 심판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서는 은혜의 때,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구원의 날임을 분별하고 그 지혜와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늦가을이 깊어 가는 이때.

내가 돌아갈 곳, 내가 돌아갈 자리가 어디인지를 찬찬이 살펴보시고 날마다 기도하시면서 이 두 가지 질문에 답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첫째, 돌아감을 위해 나는 잘 살고 있는지

둘째,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돌아갈 자리를 아는 사람인지, 이 두 가지 질문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잠언의 한 부분입니다.

잠언을 보면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악인''의인'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악인''의인'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지혜로운 사람'

이렇게 딱 나눌 수 있는지요?

사실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전적으로 악한 사람이나 전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에게도 선한 구석이 있고, 의인들 속에도 악한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지향, 바라봄입니다.

그 인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입니다.

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있는가 아니면 늘 남을 중심에 놓고 있는가? 입니다.

우선 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잠언은 악인들 혹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늘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의인들 혹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잠언, 읽어 보셨나요.

서론 본론 결론이 있나요?

모든 글이나 말에는 서론 본론 결론의 구조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잠언에서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서론 본론 결론, 이런 일정한 구조가 없습니다.

그저 잡다한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것은 속담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격언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일깨움을 주는 좋은 말씀들로 가득한 것이 잠언입니다.

그래서 잠언 어디를 찾아 읽어도 우리에게 깨우침을 줍니다.

 

잠언箴言자 어떤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성경통독 새벽기도회)

'''바늘 혹은 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콕콕 찌르는 말씀, 일종의 훈계가 곧 잠언입니다.

우리의 무감각한 마음을 깨뜨리고, 우리의 느슨해진 마음을 조이는 말씀이 잠언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언에는 분명한 중심이 있습니다.

가장 큰 가르침, 가장 큰 훈계인데 17절입니다.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중심입니다.

여호와 경외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외란 자기보다 큰 세계, 곧 자기보다 큰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그리고 그분의 지혜와 훈계 을 귀히 여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이 말하는 지식의 근본입니다.

제주도 가 보셨나요?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한라산이 보이듯이 잠언의 모든 구절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가르침과 바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을 비교하는 긴 단락의 한 부분입니다.

어디부터 읽어도 다 좋은 말씀이지만 특히, 10절부터 읽은 것이 마음에 더 깊이 와 닿습니다.

10절입니다.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새번역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의인은 집짐승의 생명도 돌보아 주지만,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하여도 잔인하다.

 

잠언이 말하는 의인이란 사람뿐만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짐승까지도 돌봄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돌보는 사람.

그가 바로 잠언이 말하는 의인입니다.

늘 생명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의인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생명들까지 경외하며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그 모든 생명들 속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고백한다면, 온 세상에 있는 뭇 생명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생명을 돌보는 생명 중심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봅시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많이 무뎌졌습니다.

이제는 생명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가려졌던 미신의 시대에도 수령이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벨 때 그냥 뵈는 법이 없었습니다.

소 한 마리를 도축해서 그냥 죽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죄스러워했고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우리는 모든 생명이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비를 말하면서도 그 결과는 항상 잔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은 10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하여도 잔인하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마음 속, 그 중심에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돌보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집짐승의 생명 하나라도 잘 돌보아 줄 수 있는 의인이 되라는 것이 잠언의 충고입니다.

그래야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로 다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잠언이 말하는 악인이라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12절입니다.

12:12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생명이 아닌 불의한 이익을 탐하는 자 그가 바로 악인입니다.

불의한 이익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뿌리지도 않은 것을 거두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을 심지도 않고 생명을 거두려 하고, 사랑을 심지도 않고 사랑을 거두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의한 이익입니다.

 

악인의 관심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당장의 이익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무관심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말이나 생각과 주장이 폭력인지도 모르고 서슴없이 폭력을 자행합니다. 더 나아가 옆에 있는 사람을 자기만족의 대상,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습니다.

이런 자를 잠언은 악인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잠언이 그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첫째, 그 사람의 말입니다.

의인과 악인, 그 차이는 그 사람이 쓰는 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12:13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악인의 말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 말만 합니다.

왜요?

자신의 행실만을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생각 자기주장 자기변명, 이것만 고집스럽게 말합니다.

그리고 남의 말에는 사사건건 토를 달고, 말의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집니다.

이것이 잠언이 말하는 악인의 특징입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그리고 목회자로서 늘 조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확신에 찬 설교’ ‘자기 확신의 찬 주장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자기 확신에 찬 설교자가 가장 위험하다

왜 그렇습니까?

늘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처신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허위의식이지요.

이 가면이 목회자에게 엄청난 특권을 주기 때문에 벗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가면과 싸우고 싶습니다.

그래야 성도가 당하는 고통의 신음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끝난 후 녹음한 설교를 들으면서 제 자신에게 늘 묻습니다.

이 설교를 통한 가르침들이 내 말과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묻고 또 묻는 것입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확신의 찬 악인의 말은 결국 그 자신을 사로잡는 덫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자기 편견에 사로잡힌 말, 사사로운 뜻을 앞세우는 말, 어떤 의도를 밑바닥에 깔고서 말하는 말은 반드시 그물이 되어 자신의 발목을 잡고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점 흔들림 없이 자기 편견을 진리인양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반면 지혜로운 사람, 의인은 어떻습니까?

늘 남의 충고에 귀를 기울입니다.

줏대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17-19절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12:17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

12:18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12:19 진실한 말은 영원히 남지만, 거짓말은 한순간만 통할 뿐이다.

 

두 번째 기준은 화, 분노를 다스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절입니다.

12:16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화는 불()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화를 어떤 사람은 화근(禍根)이라고도 말합니다.

화근(禍根), 재앙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화 잘 내는 사람은 남의 가슴에도 상처를 입히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고통을 가하는 일이기 때문에 미련한 자 모습이라고 잠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슬기로운 자는 어떻습니까?

화를 돋우어도 분을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욕을 참아 냅니다.

물론 제 3자가 볼 때 비굴해 보일 수도 있고, 무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내적 힘, 용기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잠언을 늘 가까이 하십시오.

콕콕 찌르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래야 돌아감의 자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돌아감의 때, 심판의 날을 분별할 수 있는 의인, 지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