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데살로니가전서 2:6-12 교회를 새롭게 하는 힘, 말씀(종교개혁주일)

心貧者 2015. 10. 27. 10:40

교회를 새롭게 하는 힘, 말씀

데살로니가전서2:6-12절                                                       2015/10/25(종교개혁주일)

2: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2: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2: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저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목사로서 부담이 참 많습니다.

정말 우리 교회가 개신교회가 맞는가?

이 질문에 대해 좀 솔직해 보고 싶습니다.

개신교회라 함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reforming church,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reformed church, 개혁된 교회가 아니라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

reforming church입니다.

 

한국교회의 힘은 개혁과 갱신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교회의 전통추수감사주일입니다.

국경일(National Holiday) 추수감사절을 추수감사주일로 바꾼 나라.

이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행한 개혁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개혁하고 갱신해야할 프로테스탄트우리 개신교회가 개혁에 대상, 갱신의 대상으로 전략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를 저는 19421월에 쓴 윤동주의 시 참회록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시절 조선의 청년 윤동주가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가지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유학이지요.

당시 일본 대학생들은 강제 징집에서 제외가 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창씨개명이지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운명의 날.

스물네 살 조선 청년 윤동주는 자신의 모순된 삶을 이렇게 탄식하며 글을 남깁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하지만 청년 동주는 탄식만 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뒤 업는 다짐 하나를 합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비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이지만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보고 닦아보고 매일 밤 닦아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은 자신의 마음을 이르는 은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닦어 보자'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본바탕이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이 아니라 원래 맑고 깨끗한 거울임을 잊지 말자는 다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맑고 깨끗한 거울임을 잊지 말자는 자신을 향한 다짐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닦어 보자.’

밤이면 밤마다 파란 녹이 낀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는 것입니다.

 

왜 우리 한국 개신교회가 개혁의 대상으로 전략하고 말았을까?

윤동주의 말을 빌린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본래의 모습을 잃은 채,

파란 녹이 낀 모습을 그냥 우리의 현실로 수용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을 따라가느라 숨이 가빠서 우리가 정작 가야 할 곳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만 신경 쓰지 정작 속사람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제 배 부르고 등 따신 것만 신경 쓸라 함께 살라 하신 이웃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순간순간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우리가 묻지도 않고, 그 어떠한 노력과 열심을 다 하지 않고 자기 연민에만 사로잡혀 살아가지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엔가 하나님의 복음이 있는 그대로 선포되지 않고 왜곡되어 선포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거짓과 가짜들을 닦아내려 하지 않고 제 신앙만 지키면 그만이라는 오만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영적 태만(게으름)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가 이름값도 하지 못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행한 모든 전도 사역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29절 말미입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가톨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주께서 맡기신 복음을 그대로 전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그대로입니다.

그대로

하나님이 친히 계시한, 그리고 믿음의 선친들이 친히 증언하고 기록한.

있는 그대로의 복음,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 그대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좋게 꾸며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만한 것들을 걸러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맛에 길들려지지 않는 주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복음.

그 자체를 그대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나 계시된 말씀, 참된 예언의 말씀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기적이라는 MSG, ‘비전이라는 거품을 넣어야 환영을 받지 이것들을 빼면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그렇고 예수님이 그렇고 사도 바울이 그렇고 마르틴 루터가 그런 것처럼 인간의 맛, 세상의 맛에 길들여지지 않은 착한 복음은 사람들로부터 늘 외면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고집스럽게 가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고, 하나님의 의해 기록된,

있는 그대로의 말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 있는 그대로증언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89-11절입니다.

8: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가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 하게 하며 결국은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9절의 말씀처럼 왜 우리 인생이 백주에(대낮에) 어둠을 경험합니까?

10절 말씀처럼 왜 우리의 절기와 예배가 애통으로 변화합니까?

양식이 없어서요.

아닙니다.

물이 없어서요.

아닙니다.

우리의 굶주림은 양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마름은 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아모스는 11절에서 말합니다.

여호와를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여호와의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맛, 세상의 맛, 돈의 맛에 길들여지지 않는 성경 그대로의 말씀을 그들이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자녀)인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다고 이사야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신앙의 갱신 그 핵심 매뉴얼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루터에게 있어서 바이블, 성경은 여러 책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더 바이블입니다.

바로 그 책입니다.

유일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34살 젊은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성문에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내 걸 수 있었던 것은 교황보다도, 교회보다도 더 큰 권위가 성경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깊은 성서 연구를 통해 당시 모순 된 현실 두 가지를 알아차립니다.

첫째, 교회가 범하는 죄를 알아차립니다.

면죄부가 얼마나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는 악한 행실인지 알아차립니다.

둘째, 교황의 말이나 교회 전통보다 더 권위가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 증거 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낡고 타락한 교회의 죄, 영적 태만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며 수고하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정말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있는지요?

앞으로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야할 다음 세대인 우리 자녀들에게 기억 될 만한 그런 수고와 애씀을 지금 행하고 있는가? 라는 말입니다.

 

태만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태만, 게으름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sloth(슬러프)’입니다.

sloth, ‘나무늘보라는 다른 뜻도 있습니다.

아마 느릿느릿 움직이는 나무늘보를 사람들은 게으름, 나태의 표상으로 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말하는 태만이란 단순한 게으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 곧 우리의 심령이 병들어서 의욕과 활기를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세상이 주는 불안과 염려 때문에 잔뜩 주눅이 들어 의기소침해 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영적 태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태만을 헬라어로는 아케디아akedia’입니다.

관심을 뜻하는 케도스kedos’없다는 뜻의 부정관사 a’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아케디아란 말은 자기와 관련된,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빼고는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 말을 종교개혁주일인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줄 아십니까?

중세시대처럼 오늘 우리 교회가 아케디아akedia’, 영적태만에 너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죄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일에는 정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많습니다.

스포츠, 연예계, 정치계 할 것 없이 정말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일, 영의 일, 생명의 일에는 케도스kedos’,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교인으로서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왜 제가 여러분에게 권면과 격려만 아니라 혼을 내는듯한 경고의 말씀을 종종 하는 줄 아십니까?

12절 말씀 때문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2: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것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함입니다.

오직 하나, 우리 모두가 지금 겪고 있는 영적 태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단순히 도덕적, 법률적 죄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도둑질, 폭력, 살인, 거짓말, 간음 등을 kakos’ 혹은 악행kakia’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죄로 말미암은 죄의 결과물 곧 악한 행실들이지 죄 그 자체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Hamartia란 그런 악행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합니다.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등지는 것. 그것을 성경은 죄Hamartia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정신이 팔린 상태가 죄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방금 앞에서 말한 악행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 태만입니다.

살인, 거짓말, 도둑질도 죄이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영적 태만 또한 죄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영적 게으름으로 녹슨 거울을, 녹슨 마음을, 녹슨 교회를 끄집어내서 밤마다 새벽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설교 시 참고할 자료

마르틴 루터는 14831110일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구리광산 광부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교황과 고위 성직자, 황제와 제후들의 각축과 전쟁 아래 민중들은 신음했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의미를 자각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교황과 교회에 순종적인 분위기였던 겁니다. 곧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회가 제공하는 순례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성자숭배,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인 성() 안나 숭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부유층에서는 성자 유골 수집이 유행했고, 면죄부가 팔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루터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죄성과 불안의 문제에 대해 깊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종교와 자의식이 따로 존재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모든 문제가 곧 종교의 문제였던 겁니다. 1501년 문학 석사를 마치고 법학부에 다니던 어느 날 급우가 낙뢰로 사망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공포 속에서 그는 성() 안나에게 수도사가 될 서약을 하게 됩니다. 똑똑한 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매우 화를 냈지만 그는 끝끝내 법학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자기 영혼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고집과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철저한 금욕과 계율에 입각한 청빈 생활을 하면서 설교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됩니다.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탐구하는 진지한 학자로 수도원의 연구 책임자가 됩니다. 동시에 수도원 교구를 맡아 설교자로 사역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안식하지 못한다는 뿌리 깊은 고뇌가 늘 붙어 다녔습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심지어 사제로 서품되는 순간에도, 첫 미사에서도, 그는 불안과 의심으로 딴 생각에 빠져 의식을 망쳐 버립니다.

그는 1502년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세운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1510년에서 1511년까지 로마를 여행하게 되는데 거기서 또 한 번 기억할 만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곧 죽은 삼촌을 위해 면죄부를 산 루터는 다른 조상들의 영혼도 자꾸만 생각났지만 돈이 모자라 살 수가 없었던 겁니다. 참 난감하면서도 회의스런 일이었겠지요? 곧이어 참회를 위해 바티칸 성당 계단을 피가 나도록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됐던 겁니다.

믿고자 하면 할수록 거룩하고자 하면 할수록 그 반대도 커졌습니다.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상태, 그 상태에서 하는 확신 없는 행위들. 누군가 가르쳐 준 대로 따라하는 관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체험이 없는 일방적 신앙의 무의미함을 절감했던 겁니다.

 

루터는 1512년 신학 박사가 되었고, 성서학 교수로 시편과 신약성서를 강의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를 압도하는 하나님 앞의 죄의식은 고해성사와 금욕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고해신부는 그가 너무나 자주 고해를 하러 오니까 "죄들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가지고 오라"거나, "참된 회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다""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죄를 지으라"고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사변적인 신학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때, 로마서 말씀이 그를 구원해 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구원이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새로워진 관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무조건적 용서만이 구원이었습니다. 자신의 오랜 회의와 고통의 의의가 이로써 밝혀집니다. 곧 구약성서적인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해 주고 '자기 의'를 철저히 부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데 뒤엉켜 통일되고 일관된 신앙을 가르쳐 주지 못하던 지식들이 정리되고 분명해지면서 마음의 고뇌가 뚫렸습니다.

 

깨달음 뒤에는 항상 "그렇다면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인가?" 비판적 의문이 따라옵니다. 그것이 깨달은 자의 사명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깨우침에 입각하여 가톨릭교회의 가르침들의 비성서적인 지점을 발견합니다. 교회가 가르치고 요구하는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이 은총을 주신다는 가르침은 거짓이고 인간들의 지배욕의 도구들에 다름 아님을 밝혀냅니다. 그것은 이미 한 개인의 구원을 넘어선 문제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1517년 루터는 갈수록 더해지는 교회의 악폐에 반대 의사를 표명해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됩니다. 이 해에 교황 레오 10세는 알브레흐트라는 성직자에게 한 번에 세 곳의 주교직을 허용했습니다. 목회하지도 않고, 앉아서도 천리 밖의 세금을 걷어 들이게 된 겁니다. 알브레흐트는 은행가에게 거액을 빌려 겸직금지를 면제해 준 교황에게 상납을 합니다. 그 대신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해 교황이 발행하던 면죄부를 자기의 모든 교구에서 팔고 그 절반을 자기 몫으로 받기로 계약을 합니다.

 

수금 담당자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70~1519)이라는 부흥사였습니다. 그는 가능한 많은 수입을 위해 온갖 극적인 효과를 낼 줄 아는 능력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금고 안에 동전 한 닢이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 한 영혼이 연옥에서 솟아오른다." 그러나 이 말쟁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테첼은 작센에 입국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어쩌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면죄부를 사러 갔습니다. 이에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맹렬히 비판하는 설교를 하고 '95개조의 반박문'을 써서 15171031일 비텐베르크를 관할하는 알브레흐트 대주교와 제롬 주교에게 보내고 대학 교회의 문에도 붙이게 됩니다.

 

루터는 대주교와 교황 사이의 거래를 알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것은 단지 목회적이고 신학적인 이유였습니다. 학문적 토론을 위해 라틴어로 쓰인 95개 조항이라는 문서도 대폭발을 일으킬 만큼 과격한 문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의 권리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교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겁니다.

면죄부보다 그가 더 중요하게 다룬 것은 회개와 고해성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관행이었습니다. 즉 회개와 용서란 고해성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과 지성의 자각에 의한 평생에 걸친 지속적 변화라고 주장했습니다. 고해성사 무용론인 셈이지요? 하나님과 죄인 사이, 성직자라는 직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95개 조항'이 독일어로 번역되자 몇 주 안에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됩니다. 확산의 주동자들은 독일의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루터는 비로소 비텐베르크 밖에도 자신과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잉골슈타트대학의 신학교수요 한때 루터의 친구이기도 했던 요한 마이어 엑크(Johann Maier of Eck, 1486~1543)는 루터를 이단으로 기소합니다. 1518,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니칸 수도사들은 루터를 다시 로마에 공식적으로 고소합니다. 무조건 굴복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주장을 밀고 나가든지 여지없는 선택에 몰리게 됩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책을 검열하고 답변서를 제출하도록 했고, 로마교회는 면죄부를 판매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60일 이내에 로마에 출두하도록 명령받은 루터의 운명은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맡겨지게 된 겁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영지에서 유명해진 젊은 신부를 사지로 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해 로마의 지시를 거절합니다. 그 대신 아우크스부르크의 제국의회에서 교황의 사절에게 답변하도록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교황의 사절은 루터와 일체 토론을 하지 말 것과 어떻게든 그를 체포할 것을 명령받고 옵니다. 그는 루터가 교황의 면죄부 판매 권한을 인정만 하면 사건은 끝나게 될 것이라 설득합니다. 루터는 거부합니다. 그는 나아가 이 문제를 공의회에 부칠 것을 제안합니다. 무명(無名)의 일개 수도사가 공의회를 요청하다니 가톨릭교회는 황당할 정도로 당혹감에 빠지게 됩니다.

 

독일 인문주의자들은 이때야말로 독일 민족이 로마로부터 독립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루터를 돕기 위해 결집합니다. 루터는 이제 이 문제가 얼마나 크고 거대한 문제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교황이라는 체제로부터 적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게 됐던 겁니다. 마침내 독일을 교황으로부터 영적으로 해방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임을 깨닫게 됩니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논문에서 그는 독일 전체가 종교개혁에 참여할 것을 역설합니다. "교황의 학정은 끝나야한다. 공공요금과 과세는 억제되어야 한다. 억압은 철폐되어야 한다. 독일교회의 문제는 독일감독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직자는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 과다한 교회 축일은 절제되어야 한다. 탁발종단과 걸식은 금지되어야 한다." 마치 선거 유세를 하듯 공창의 폐지, 사치의 억제, 대학과 신학 교육의 실천적인 개혁안을 제시합니다. 독일 사회는 열렬한 환영으로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찰스 5세는 부분적 개선에는 동의하지만 로마 체제에서 이탈하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문제 해결을 위해 보름스 국회를 엽니다. 교황은 대칙서를 통해 루터를 파문하는 파문장을 보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을 찢어 버립니다. 황제는 루터가 이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제후들뿐 아니라 독일 민족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는 루터를 죽일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습니다. 루터는 마침내 보름스국회에서 입장을 밝힐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됩니다. 국회는 루터에게 그간의 교황에 대한 모든 불경을 취소할 것인지 묻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성서적 논증이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이상 철회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루터는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라는 말로 청문회를 끝냈다고 합니다. 루터가 말한 '여기'란 어디일까요? 육신의 궁지이지만 영혼의 진리인 자리. 그 자리 외에는 자신이 안전하지도 안전할 수도 없다고 말했던 겁니다. 황제는 분노했고 토론은 중단되었습니다.

 

루터는 누가 보든지 곧 죽임당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아닌 독일의 정세가 다시 한 번 그를 살립니다. ()제후가 그를 납치해 발트부르크성()으로 도피하게 했고 그가 사라지자 독일 민중들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그는 저술을 통해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그의 글은 삽시간에 전 독일에 퍼지고 종교개혁의 불길이 바람을 타고 타오릅니다. 루터는 독일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합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겠지요? <성서>가 민중을 각성시키는 원천이 되어 역사의 전면에 나왔던 겁니다. 당시 '새들의 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발트부르크 성에서 루터가 스스로 작사 작곡한 노래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하는 곡입니다. 개신교 찬송가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이 찬송을 '알프스의 눈사태'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1521년 가브리엘 츠빌링은 미사를 비난하고 성직자 서약 철폐를 촉구합니다. 이에 따라 많은 수도사들이 직책을 버립니다. 성탄절에 칼 슈타트는 사제의 의복, 헌물, 봉헌 없이 평신도들에게 잔을 주고 성찬을 거행했습니다. 모든 성직자가 결혼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자신도 결혼했습니다. 그는 공중 예배에서 성화, 오르간, 그레고리안 성가를 거부했고, 예배를 독일어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또 시 예산으로 구제하여 빈민들의 구걸을 없애도록 개혁 조치를 실현했습니다.

 

같은 시기, 스위스의 취리히에서도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주도로 개혁 운동이 시작됩니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 스위스, 영국 등 전 유럽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농민반란과 종교개혁이 뒤엉킨 연속 사태가 일어나고 마침내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 역정에서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로 종교개혁을 지도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혹은 진리에 반한다는 명목으로 죽어갔는지 모릅니다. 츠빙글리는 카펠 전투에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어 갔습니다. 흔히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와 장 칼뱅을 '종교개혁의 세 지도자'라 부릅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해야할 것은 역사란 단지 이 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역사가 불러낸 도구들이었고 지도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철저히 도구로 역사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위대한 점입니다.

 

루터는 1546218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주께서 나에게 주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나는 그를 사람들에게 가르쳤으며 그를 알았고 내 생명처럼 그를 사랑했습니다. 나의 혼을 주께 드립니다. 내 영을 주께 의탁합니다. 주께서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