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들음에서, 복음전파
로마서10장 14-21절 2015/10/21(수)
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두 명의 거리전도자(노방전도자)가 있습니다.
존 웨슬리 그리고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입니다.
감리교 운동의 모태인 홀리 클럽의 창시자요 동역자입니다.
둘 다 옥스포드 출신의 신학자, 설교자, 영국성공회 신부입니다.
조지 휫필드
아마 이 분의 거리 전도 사역이 없었다면 100년 후인 1875년 무디(Dwight Lyman드와이트 레이만, Moody)부흥운동이 미국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무디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가 조선땅을 밟지 않았을 것입니다.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10년 100만인 구령운동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 조지 휫필드의 복음 전도사역입니다.
복음전도사역, 어디서 행한 복음전도 사역입니까?
거리입니다.
예배당이 아닌 ‘거리’라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합니다.
휫필드가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으로 찾아 낸 것이 거리전도 집회입니다.
조지 휫필드의 첫 야외(옥외) 설교로 택한 곳은 킹스우드 탄광이 있는 광부들 앞에서입니다. 첫 야외설교 장소가 탄광촌입니다.
탄광촌의 광부들, 그들은 술꾼이었고 도박꾼이었고 싸움꾼이었습니다.
석탄을 파내는 일 외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휫필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새까만 볼이 뜨거운 통회의 눈물, 회개의 눈물로 얼룩진 것입니다.
이 소식이 영국성공회를 감독하는 감독에게 들어갑니다.
그러자 교회의 감독은 옥외설교, 거리 전도를 금지시킵니다.
이유는 성공회 신부로서의 품위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공인된 예배당이 아닌 아무 곳에서 설교나 성경 해석을 계속할 경우 파문시키겠다고 경고하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 전도사역을 옥외에서(거리에서) 행하게 됩니다.
결국 웨슬리도 휫필드처럼 거리 전도집회 사역을 하다 둘다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 때 나온 웨슬리의 말이 ‘세계는 나의 교구다’는 말입니다.
‘성공회가 나의 교구가 아니라 세계가 나의 교구’라는 말입니다.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는 말입니다.
휫필드는 거리 전도가 방해당할 때 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산산 조각나 쓰러질 때까지 그리스도를 선포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밤낮으로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좋았던지 한 주에 평균 15번에 거쳐 약40-60시간 설교했습니다.
40-60시간 설교, 이것은 설교를 해 본 사람만이 아는 어마어마한 노동의 강도입니다. 거의 자기 몸 돌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헌신한 사람이 휫필드입니다.
설교 후에 휴식을 취하기보다는 초청한 교인 집에 가서 찬양하고 중보기도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에 대한 성도의 궁금증들을 친절하게 상담 해주기도 하다가 다음 설교할 시간이 되면 또 그곳으로 이동해서 설교했다고 합니다.
초인간적인 전도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걱정하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좀 쉬엄쉬엄 하시지요’
그러자 휫필드가 그 즉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녹이 슬어 없어지는 것보다 달아서 없어지는 것이 난다’
그만큼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이 휫필드입니다.
의 사람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일지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연히 조지 휘필드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그가 고아원 설립기금을 모으는 순서로 설교를 끝마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게서는 한 푼도 얻어내지 못할 걸'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설교가 계속되는 동안 내 마음이 누그러져 동전을 헌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에 또 한 번 감동 받은 나는 동전만 낼 나 자신이 부끄러워져 은화를 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가 마무리되자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주머니를 다 털어 한 웅큼의 동전과 서너 개의 은화 그리고 다섯 개의 금화를 모두 헌금 접시에 내고 말았다. 그날 같이 설교를 들은 친구 중 한 사람은 혹시라도 휫필드의 설교에 감동되어 헌금을 하게 될까봐 집에서 나올 때 미리 주머니를 비워놓고 왔지만 설교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 되자 그는 헌금하고픈 강한 욕구를 느껴 가까이 서있던 이웃사람에게 돈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휫필드가 영국을 넘어 미국에 가서 전도할 때 일입니다.
1770년 9월 19일 전도 집회를 마치고 ‘보스톤’으로 가던 도중에 ‘엑서터’라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휫필드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즉석 전도 집회를 요청하게 되자 예정에도 없던 집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야외 집회 장소가 마련되고 강대상에 오르기 전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낮은 소리로 말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설교하는 것 보다 침대에 가서 눕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그만큼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상태였고 지쳐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임시 집회 장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단에 서자 눈을 감도 휫필드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있지만 하지만 그 일에 실증을 느끼지는 않고 있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 못했다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들판에 서서 말하게 하시고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며 주님의 진리로 모든 사람에게 인치게 하옵소서. 그 다음에 죽어 본향으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은혜 받은 줄 모릅니다.
휫필드의 설교 중에서 가장 감명 받은 설교 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설교자 휫필드가 나타나지 않자 그가 묵는 숙소로 찾아갔더니 이미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얼마나 기막히고 멋진 전도자의 삶을 살다가 갔는지 모릅니다.
멋진 죽음 아닙니까?
왜 휫필드는 자신을 몸을 돌아보지 않고 쇠붙이처럼 달아서 없어지기를 원했을까?
그 이유를 오늘 본문 앞 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2-13절입니다.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왜 휫필드는 자신을 몸을 돌아보지 않고 쇠붙이처럼 달아서 없어지도록 복음 전도 사역에 매진했는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12절입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부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의 부유함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주의 복음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부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전도자들이 지치도록 병들도록 쇠붙이처럼 달아서 없어질 때까지 복음을 전도한 것입니다.
휫필드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고 많은 전도자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로 부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하심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를 영광과 존귀와 부요함으로 그리고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심의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그 능력이 이름이신 예수님이 전파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이런 말 있지요.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짜다.’
아무리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 인간을 부요케 하고 영광스럽게 하고 존귀하게 하고 구원하게 하는 생명의 복 하늘의 복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오늘 본문에서 다룬 것입니다.
14절-15절 전반부입니다.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부뚜막에 소금도 넣어야 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전해야 생명의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말합니다.
17절입니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이스라엘 사람들 곧 동족 유대인들도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리고 듣지 못한 자가 믿음을 어찌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이 논리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이스라엘에게도 복음이 전해져야, 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어야 믿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방인과 유대인에게 서로 다른 잣대를 됩니다.
이방인들에게는 14절과 15절과 17장이 주장하는 논리가 맞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 예수를 어떻게 부를 수 있겠으며,
또 들은 적이 없는 예수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으며,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이 논리와 주장이 맞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는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고 선포하시고 애쓰시고 또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10:18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유대인들)은 들은 일이 없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시편19:4)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퍼졌다" 하였습니다.
10:19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그리스도를)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신 32:21)
10:20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사 65:1)
10:21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사 65:2)
그러니 하나님의 구역 역사 속에서 핑계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듣지 못해서 못 믿어다.’
‘알지 못해서 못 했다.’
이런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부모님 말씀 듣는 것이 효의 시작이듯이 예수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의 시작입니다.
듣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의가 세워지고 믿음의 의가 풍족해 지는 역사가 날마다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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