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소생시키는 힘, 숨
이사야 57:14-21절 2015/10/11(주일)
57:14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57:16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고 노하였으나 그가 아직도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걸어가도다
57:18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57:19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57:20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57: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하늘 구경 못지않게 재미난 구경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 구경입니다.
사람 구경만큼 재미난 구경도 없습니다.
교회 마당에 나가 있다가 담 넘어 거리를 걷는 이들을 보면 가끔 가슴이 뭉클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에서 저도 모르게 강한 힘을 얻습니다.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걷고 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 그 발걸음 끝이 하늘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향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입니다.
아마 제가 그 분들 뒤에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는 것.
그들은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선포하듯이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발걸음의 끝이 하늘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 향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제가 교회 앞마당에서 드리는 화살기도입니다.
화살기도란 순간적으로 느끼는 정이나 바라는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말하는데 저는 이 화살기도가 반드시 응답되리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품은 이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의 역사를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서 47장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긍휼하심을 보게 됩니다.
끝이 없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항상 이스라엘이 택한 길은 진리의 하나님이 아니라 거짓이었고 우상이었고 허영이었습니다. 오직 제 것 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 마음이 향했습니다.
바보처럼 자식만 바라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아주 잘 나타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그것은 분명 거짓 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심판 속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14절입니다.
57:14 그가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새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내가 말한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
드디어 기회가 주어집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렸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꿈에도 그리고 그리던 자기 고향,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지요.
더 놀라운 것은 고향으로 가는 그 길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 나 포로로 끌려 간 그 길은 수치의 길이요 명망의 길이었지만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길은 영광이요 축복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길, 그 축복의 길을 향해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걸음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라‘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귀환하는 그 길은 본토, 곧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회개의 길, 화해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참 능력, 하나님의 진면목을 맛보게 하고 알게 하고 깨닫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까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멀리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떤 형상도 없는, 보이지 않는 영으로만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신’이라 함은 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도록 웅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꼼짝하지 못할 정도로 무섭고 위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웅장하지도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만 가끔 하셨지 어떠한 형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상의 땅 가나안에서 그들이 영으로만 거하시는 하나님 보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더 따르고 신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비가 필요하면 바알에게 빌면 되었고, 자식이 필요하면 아세라에게 빌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우상에게 팔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물론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 신세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우상 숭배는 피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의 생활 말, 그대로 참당한 고통이었습니다.
참당한 고통.
그 고통은 때로는 돌이킴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이스라엘은 매일 같이 소망을 품고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다시 고향 이스라엘로...’
드디어 그날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땅을 돋우고 돋우어서 길을 내어라. 나의 백성이 걷는 길에 거치는 것이 없게 하여라.
그런 후 이렇게 길을 돋우어 수축하고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라는 것입니다.
바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세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돋우어 수축하고 그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 줍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57:15 전반부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
한때 우상에게 팔렸던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희가 돌아갈 길을 돋우어 수축하고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줄 아느냐?
누가 네 길을 축복하는지 아느냐?
첫째, 지극히 존귀하시며
둘째, 영원히 거하시며
셋째, 거룩하다 이름 하시는 이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크기, 하나님의 존귀하심, 하나님의 위용 가늠이 되십니까?
지금 이사야가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며,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의 크기와 존귀하심의 높이와 위용이 가늠이 되십니까?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크기와 높이와 위용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경험한 신상들 예를 들자면 바알과 아세라의 신상의 크기와 높이와 위용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높이와 위용입니다.
최근 발표된 과학 잡지에 따르면 지구와 기후 조건이 가장 유사한 행성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행성이 지구로부터 1400광년이나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걸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로 바꾸면 1경 1천 2백 54조km가 됩니다.
감이 잡힙니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숫자입니다.
우주의 크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 놀라운 반전이 오늘 본문에 숨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주의 크기를 보자면 우리들의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에게 지극히 높으시며,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첫째, 지극히 존귀하시며
둘째, 영원히 거하시며
셋째, 거룩하다 이름 하시는 이가 누구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까?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우주보다 큰 자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15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 누구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까?
티끌보다도 못한 존재 우리이지만 첫째 겸손한 사람 그리고 둘째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과 함께 있겠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을 지적해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하늘만큼 크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교만한 사람 잘못을 지적해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과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돌이킴, 구습을 버리는(옛사람의 모습을 버리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줄 아십니까?
그래야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 함께 하는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즉 만군의 주 여호와의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회개 곧 돌이킨 사람만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진정한 힘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우리를 못났다고 작다고 무시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계속 무릎 꿇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시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를 높이 세우시고 상주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상처를 주님 앞에 드러냈다고 해서 우리를 외면하거나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버리시기는커녕 오히려 상한 마음을 감싸주시고 아물게 하시며 살아갈 용기까지 북돋우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회개가 가지고 있는 힘, 참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마음만 우리가 다 잡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가져갈 수만 있다면 돌이킴, 거듭남, 회개의 힘과 하나님의 능력은 영원히 우리의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5절의 말씀처럼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이 교만을 떠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방그리스도교의 스승인 ‘성 크리소스토모스’는 회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약, 부상당한 이들의 치료제, 불의의 척결, 하느님을 향한 용기, 사탄에 대항하는 무기, 구원의 희망, 그리고 절망의 제거입니다. 회개는 하늘을 열어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해주고 사탄을 이기게 해줍니다.’(요아니스 알렉시우 대사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문제는 우리의 비루함,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욕망의 찌꺼기, 죄의 습성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고 몸부림쳐도 이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요?
그 해답 역시 하나님의 긍휼 속에 있습니다.
16절부터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57:16 (하나님이 한 말입니다)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
57:17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57:18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57:19 이제 내가 말로 평화를 창조한다. 먼 곳에 있는 사람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 평화가 있어라." 주님께서 약속하신다. "내가 너를 고쳐 주마."
내 안에 남아 있는 욕망의 찌꺼기, 죄의 습성, 누가 고쳐주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57:18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긍휼,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평화를 노래하는 노래꾼 홍순관 집사님의 노래 중에 '나는 내 숨을 쉰다'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숨 쉰다 숨을 쉰다/ 꽃은 꽃 숨을 쉬고/ 나무는 나무 숨을 쉰다.
숨 쉰다 숨을 쉰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
숨 쉰다 숨을 쉰다/ 별은 별 숨을 쉬고/ 해는 해 숨을 쉰다.
숨 쉰다 숨을 쉰다/ 바람은 지나가는 숨을 쉬고/ 신은 침묵의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에 묻고 싶은 질문이 이 노랫말에 나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숨을 쉬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숨을 쉬고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꽃은 꽃의 숨을 쉬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나무는 나무의 숨을 쉬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어떤 숨을 쉬고 있습니까?
원래 하나님이 주신 숨, 제 숨을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탄이 주는 욕망의 숨이 아니가 거짓이 주는 허망의 숨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하나님의 숨, 제 숨을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홍순관 집사님은 말합니다.
‘종교(교회)의 숨이 거짓이 되면 세상은 깊은 상처를 받고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되고, 성도의 숨이 가식이 되면 이웃은 멀어지고 하나님은 세상에 통로를 그만큼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꽃은 꽃의 숨을 쉬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나무는 나무의 숨을 쉬는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고 고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자녀답게 하나님의 숨, 제 숨을 쉴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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