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히브리서 5:7-10 고난으로 배우는 순종, 기도

心貧者 2015. 10. 6. 10:34

고난으로 배우는 순종, 기도

히브리서 5:7-102015/10/4(주일)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가을입니다.

가을, 하늘 구경하기 참 좋은 계절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인지 버릇처럼 하는 행동 중의 하나가 하늘 바라보기입니다.

하늘묵상이지요.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늘 구경, 하늘 묵상, 제법 할 만합니다.

 

제가 교회에 와서 누리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하늘을 마음껏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현관문만 나서면 맑은 하늘을 마음껏 볼 수 있어서 저는 참 좋습니다.

맑고 높은 하늘을 보면서 묵상하고 있으면 마음이 얼마나 맑고 시원해지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다가도 뒤를 돌아 다시 땅을 바라보면 괜히 혼자 서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맑은 하늘과 대조되는 제 안의 음습함 때문입니다.

맑은 하늘과 달리 숨길 수 없는 음습함이 제 속마음으로부터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욕망의 찌꺼기에 휘둘리는 비루한 저의 현실을 볼 때마다 참 부끄럽다라는 생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참 부끄럽다비루함입니다.

 

성상숭배라고 해서 우리 개신교회가 멀리하는 그림 중에 이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콘’, 들어보셨습니까?

벽화나 모자이크 그리고 목판 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보통 성화라고도 부릅니다.

주로 사용되는 그림의 소재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와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그림이 주소재이고 성모, 순교자와 성인들 그리고 천사들까지 다양한 소재로 그린 그림을 우리가 이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이콘을 성상숭배라고 해서 금하고 있지만 특히 정교회라고도 부르는 동방그리스도교회에서는 이콘경배가 아주 중요한 신앙의 핵심요소입니다.

동방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친치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곧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림으로도 나타낼 수 있고 묘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려진 이콘은 단순한 인간의 그림이 아닙니다.

경배의 대상 대상이지요.

이것이 동방그리스도교 신앙의 특징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콘을 만나고 싶다면 가까운 정교회를 찾아가면 직접 볼 수 있습니다. 두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한국정교회 대교구가 있는 서울 성 니콜라스 주교좌 대성당입니다.

서울 아현동 애오개역 4번 출구로 나와서 한 5분 정도 동남쪽으로 걸으면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소개할 곳은 인천 간석동에 있는 정교회입니다.

인천시청역 1번 출구에 나와서 북쪽 상인천초등학교 쪽으로 한 10분 정도 걸어가면 인천 성 바울로 성당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름이 성당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천주교회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동방그리스도교와 한 뿌리인 한국정교회 소속 교회입니다.

 

제가 이처럼 이콘을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콘이 주는 두 가지의 매력 때문입니다.

 

첫째는 빛의 힘, 빛의 능력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교회 이콘의 특징은 빛입니다.

천국을 상징하는 금빛과 보혈을 상징하는 붉은 빛이 가지고 있는 힘과 조화입니다.

빛의 미학, 빛의 예술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콘을 보시면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어둠의 권세를 몰아내는 빛의 힘, 빛의 능력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콘이 주는 매력입니다.

 

두 번째로 정교회 이콘이 주는 매력은 사랑의 힘입니다.

이콘은 빛의 힘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힘까지 느끼게 합니다.

정교회 이콘의 특징이라면 악한 사람이나 사탄을 그릴 때 어둡거나 흉측하거나 사악하게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선과 악의 차별을 위해 선한 것은 밝고 좋게 그리고 악한 것은 어둡고 흉측하게 그리게 마련인데 정교회 이콘은 그렇지 않습니다.

빛만 없지 어둡거나 흉측하거나 사악하거나 무섭게 그리지 않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게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으로 타고난 존재는 없습니다.

다만, 잠시 이 험한 세상에서 빛을 잃은 존재가 되어서 악한 짓, 마귀의 자식, 사단의 자식이 된 것 뿐이지 그들 역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총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 곳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나 사탄을 그릴 때, 어둡거나 흉측하거나 사악하거나 무섭게 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콘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입니다.

 

숙제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콘을 통하여 두 가지의 힘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빛의 힘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빛 곧 은총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의 힘을 꼭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주목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7절 전반부입니다.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욕망의 찌꺼기라는 비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그리고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쳐 주셨던 하늘의 진리와 하늘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연약한 육체로 계실 때, 자기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연상되는 장면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6장에 나오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그리고 기도와 탄원을 연결하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드리셨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어떤 내용입니까?.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잔 곧 마실게 될 고난의 잔, 십자가의 잔, 죽음의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구원의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하지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결단의 기도입니다.

 

내용으로 보면 서로 다른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꼭 살려달라는 기도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희생제물 곧 죽어도 좋다는 결단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이 보다 더 하모니를 이루는 기도는 없습니다.

꼭 살려달라는 구원의 기도나 하나님의 희생 제물이 되어도 좋다는 결단의 기도, 헌신의 기도나 다 부활의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새 뜻을 향해 달려가지 때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난 곧 십자가는 생명 곧 부활의 생명을 품은 기도의 사람을 낳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7절을 주목합니다.

통곡과 눈물그리고 기도와 탄원

이것을 서로 합하면 통곡의 기도’, ‘눈물의 탄원이 될 것입니다.

통곡의 기도’, ‘눈물의 탄원

느낌이 오십니까?

고난과 그리고 기도

여기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그 감을 잡으셔야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고난 앞에서 징징거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드리는 통곡의 기도’, ‘눈물의 탄원이 무엇인지 그 감을 잡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 번 반복하지만 찬송가 3701절과 2절과 3절의 가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에 한숨변하여 내노래 되였네

 

내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

 

제가 요즈음 예배 시간 특히 기도회 시간마다 느끼는 고민이 하나 있어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통곡의 기도’, ‘눈물의 탄원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영적 간절함이지요.

예배나 기도회 참석하는 인원, 기도회의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영적 태만, 영적 게으름입니다.

겉으로만 신앙의 의무를 지키는 것에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영적 생기를 잃은 쭉정이 신앙. 영적 태만, 영적 게으름이 무서운 것입니다.

기도할 때인지, 정말 그 어느 때 보다도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때인데 점점 기도의 힘, 영적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너무 아픕니다.

물론 기도를 막을 만큼 근심과 걱정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선택한 길은 기도였습니다. 다시 본문 7절을 새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드리는 통곡의 기도’, ‘눈물의 탄원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 죽음의 위기, 절망의 상황 속에서 선택한 길입니다.

통곡의 기도’, ‘눈물의 탄원입니다.

 

왜 기도가 막힐까요?

고난이 주는, 시험이 주는 근심과 걱정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짐이 너무 커서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 기억하십시오.

찬송가 370장의 1절의 가사처럼 십자가 밑에 나아가 그 짐을 내려놓고 살려 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통곡의 기도’ ‘눈물의 탄원을 한 번 드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2절의 가사처럼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고, 전날에 한숨이 변하여 내 노래가 되는 역사 그리고 3절의 가사처럼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오늘도 고난이지만 그래서 아프고 힘들지만 그 고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곧 부활의 생명을 품은 기도의 사람으로 세우시는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반드시 생명을 품은 이가 드리는 기도는 응답이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다시 7절입니다.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리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브리서는 자신 있게 증거 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품은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하심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멘이라는 순종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렸던 기도의 두 번째 내용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는 아멘의 삶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살려 달라는 통곡의 기도, 구원해 달라는 눈물의 탄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기도가 응답되어 십자가의 죽음, 사망이 아니라 저주가 아니라 조롱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레위 가문에 속한 대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은 정의의 왕, 평화의 왕입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생명의 끝도 없는 존재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이 전혀 필요 없는 자가 멜기세덱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대제사장이 되어서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 단번에 그리고 완전하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드린 기도의 응답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고 바치는 기도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응답이 없다면 우선해야 할 일 하나가 있습니다.

조율입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우리의 삶을 우선 조율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 진실한 기도는 생명을 품은 기도는 헛되이 흩어지는 법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드린 후에는 그 기도가 응답된 줄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바라는 바를 아뢰는 것(祈禱)이기도 하지만 바라는 바를 기획하고 도모하는 일(企圖)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영국교회의 아침 기도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삶이 누군가가 주님께 바친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진실한 기도를 우리가 놓지 않는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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