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누가복음 11: 24-26 새로운 인생의 출발, 하나님 모심

心貧者 2015. 11. 10. 11:07

새로운 인생의 출발, 하나님 모심

누가복음 11:24-262015/11/8

11: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11:25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11: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오늘은 무르익다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할까합니다.

무르익다

뭔가 묵직한 무게감과 세월의 깊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전적 의미로는 두 가지를 품고 있습니다.

첫째, 과실이나 곡식 따위가 익을 대로 푹 익은 상태를 우리는 무르익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곡식이 무르익다’ ‘과일이 무르익다

좀 더 시적인 표현을 한다면 가을이 무르익다

이 정도로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뜻은 이런 뜻을 품고 있습니다.

시기나 일 따위가 적당하게 되어서 충분히 성숙할 때 무르익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숙하다

사실 저는 이 뜻을 더 곱씹어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이든 운동이든 예술이든 기술이든 목회이든, 자기 분야에서 오랫동안 기량을 연마하여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성숙한 것을 보면 참 편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경직, 딱딱함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목에 힘을 주는 법도 없습니다.

소탈하고 유연하고 자유롭고 그리고 아주 편해 보입니다.

 

가수를 예로 들자면 세시봉이지요.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노래를 진짜 잘하는 분들을 보면 높은 소리를 내면서도 내 지르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듣는 사람을 배려하지요.

그래서 내 지르는 높은 음도 높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 취양이지만 저는 송창식씨의 노래가 여기에 가장 가깝다 여겨집니다.

고개사냥, 왜 불러, 한번쯤, 가나다라, 담뱃가게 아가씨, 눈이 부시게 등

 

이는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무르익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르익은 성도들을 보고 그리고 그분들이 행하는 것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고, 편안해 지고, 그리고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무르익은 기도를 대하면 제 자신도 모르게 영혼과 몸이 맑아집니다.

무르익은 사랑의 손길, 착한 행실을 대하면 제 자신도 모르게 편안해 지지요.

그리고 무르익은 성도의 말 한마디를 대할 때마다 제 자신도 모르게 깊어집니다.

 

반면, 무르익지 못하고 그냥 세월의 무게에 묵은 분들이 있습니다.

묵은 닭과 같은 성도지요.

이분들 보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기도, 늘 묵은 기도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착한 행실, 맨날 옛날 타령입니다.

옛날에 내가 말이야!’

말 한마디?

늘 바른말하지요.

틀린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듣는 이에게 꼭 상처를 남깁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썰 익은 신앙 그대로 묵혀두고 있는지요.

아니면 성령이 주시는 따스한 빛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무르익고 계시는지,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이라는 책에서 이철수 화백이 자기 집 텃밭에서 키운 땅콩을 수확한 경험을 판화로 옮기면서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땅콩을 거두었다.

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

덜된 놈! 덜 떨어진 놈!"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웃어넘겼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제 이야기 같아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설교를 통해 많이 들었던 아주 익숙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내용은 아주 간단합니다.

귀신들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신이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던 귀신이 다시 돌아오게 되지요.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사람의 형편과 상황이 처음보다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비유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참 의미심장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귀신을 떠나게 하는 귀신축출 곧 축사와 관련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논쟁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이 있습니다.

주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23-24절입니다.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천국복음 곧 하나님나라를 증거 하는 전도사역)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치유사역입니다)

 

이 세 가지 사역 중에서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특히 주목한 사역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역 치유사역입니다.

특히 귀신을 떠나게 하는 귀신축출이 주 관심사였습니다.

누가복음 617-18절입니다.

6: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더러운 귀신을 떠나게 하는 축사, 이는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11장에서 또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114절 이하를 보면 아주 기인한 일이 또 벌어집니다.

귀신이 들려 말 한 마디도 못하는 벙어리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11: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참 신기한 일이지요.

여러분,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는 이런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누가의 생각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런 치유사역 특히 귀신축출 사역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독 누가복음에는 이와 관련된 것들이 연이어서 기록됩니다.

 

누가복음 8장 일곱 귀신 이 나간 마리아

누가복음 8장 귀신들린 거사라 사람

누가복음 9장 귀신들린 소녀

그리고 오늘 본문인 11장의 귀신들려 말 못하는 벙어리

 

그런데요.

이 일을 보고도 삐딱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합니다.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역사입니까?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역사다

참 딱한 일이지요.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그들의 요구입니다.

11: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이거 말고 당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귀신축사, 이것은 귀신들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 그것 말고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딱한 일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들을 그냥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은 유대교의 영적 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말씀, 그 분야에 대한 전문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귀신에 사로잡혀 말 한 마디도 못한 사람이 회복된 것을 보고도 함께 기뻐하거나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낯선 존재를 부정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럽고 딱한 일입니까?

'바알세불의 하수인

이것이 그들이 예수님에게 찍고 싶었던 낙인이었습니다.

 

그러자 우리 주님이 반격에 나섭니다.

11: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1: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나는 '바알세불의 하수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힘을 가진 사람인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쫒아내는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살아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살아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 유대교의 지도자인 너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 속에 머물던 악한 귀신(unclean spirit)이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여기서 비유로 말한 어떤 사람이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말합니다.

그들 속에 머물던 악한 귀신(unclean spirit)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제 발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유추하기는 조금 더 나은 거처를 구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래서 물 없는 곳을 다니면서 쉴 곳을 찾아 나섭니다.

물 없는 곳

귀신이 쉴 곳으로 택한 '물 없는 곳'이란 아마도 생명의 기운 곧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 수 없는 메마른 심령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이미 말 못하는 귀신이 떠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에서 물 없는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계획을 변경합니다.

물 없는 곳곧 생명이 살 수 없는 곳, 하나님의 은총이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겠지요.

 

그런데 이게 어찌된 왠 일입니까?

말끔하게 비워진 상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다른 주인 곧 하나님을 모시고 살 줄 알았는데 빈 집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않는 빈 집에 떠났던 귀신이 다시 돌아오면서 이 번에는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 곧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나중 형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전 보다 더 악하고, 더 고집스럽고, 더 교만한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는 묵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사상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혁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 그 다음날이다

그렇습니다.

혁명이란 현실의 체제를 뒤집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집은 다음에도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혁명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생명, 거듭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가 어떻게 묵은 행실만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생명력을 잃은 묵은 행실만을 고집하다면 새 생명, 거듭남의 역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처럼 나중 형편이 전 보다 더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무르익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 보다 우리의 형편과 상황이 날마다 나아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을 하나님 모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의 시작도 하나님 모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모심입니다.

이제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힘이어 살아가겠다는 하나님 모심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 모심

여기에 우리의 인생을 걸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