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막1:9-15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1/27일)

心貧者 2008. 1. 28. 13:58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1:9-15절 2008/1/27주일예배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 오심을 보시더니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복음서가 네게 나옵니다.
어떤 것이 있습니까?
순서대로, 마태복음(28) 마가복음(16) 누가복음(24) 요한복음(21)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4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서가 있습니다.
어느 복음서입니까?
마가복음입니다.
16장으로 기록된 마가복음은 복음서중에 가장 짧은 복음서입니다.
하지만 이 마가복음이 복음서의 원조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잊으면 안 됩니다.
마가복음이 최초의 복음서라는 말입니다.

이 마가복음은 같은 공간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던 세례 요한을 소개한 후에, 예수님도 그에게 나와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내용도 간단하고 문체도 간결합니다.

9절입니다.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예수님이 지금까지 갈릴리 나사렛에서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요한이 세례를 준 곳이 요단강이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나중에 마태는 이 단순한 정보를 기반으로 해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대화체로 만들어 냅니다.

마태복음 3장 14-15절입니다.
3: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가가 전한 간단한 정보와 달리 마태는 그의 저서인 마태복음에서 마가의 이야기를 상당히 덧붙이게 되는데 이렇게 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와 세례 요한을 따르는 세례요한의 제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을 따르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선생님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을 들어 세례요한의 우월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예수님보다는 세례요한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원조로 따진다면 사실 자신들이 원조 중에 원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총대를 메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여기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더 큰 영적 스승으로 여겼다는 것과 그리고 세례를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게 됩니다.
결코 예수님 보다 세례 요한이 우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향한 제자 마태의 심정, 마태의 충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마태보다는 마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더 순수하고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큰 자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냐?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냐?’
이것은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으로 발을 옮겨야만 했는가?’ 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 먼 요단강으로 향했는가?’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이 증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가 필요 없는 분입니다. 세례요한이 베푸는 물세례 따위로 깨끗하고 정결하게 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오해를 무릅쓰고 예수님은 그 먼 요단강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요단강에서 뭇 사람과 동일하게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마음으로 그랬을까?

아마 이런 마음일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원주 사람인 ‘장일순’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보통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당신을 찾아온 젊은이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다고 합니다.
“큰비가 오는 바람에 강물이 흙탕물이 됐다고 하자. 그 물, 그 흙탕물을 다시 맑은 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젊은이가 대답을 못하자 장일순 선생님이 말문을 엽니다.
“세 가지 부류가 있겠지. 한 부류는 강둑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 부류는 둑을 쌓는 사람들일 거야. 둑을 쌓고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나라면 물속에 들어가 물과 함께 흘러가겠어. 흘러가며 맑아지는 거지.”

바로 이 마음입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이기적이고, 음란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당파심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흙탕물이지요.
그런 흙탕물과 같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요단강 물에 몸을 담그겠다는 것이 아니라 흙탕물과 같이 더럽고 추악한 우리 몸 안에 정결한 하나님이 몸을 담그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흘러가면서, 우리와 함께 동거하면서 우리를 맑고 정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올바른 의미이고,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까닭입니다.
‘임마누엘’이지요.

이처럼 지금도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에 풍덩 뛰어들고 계십니다.
거기가 비록 흙탕물이라도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11:19)라는 비아냥과 조롱을 듣는다 할지라도 그들을 정결케 하고 그들을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 흙탕물 안에 몸을 담그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입니다.

찬송가 133장입니다.
요즈음 제가 콧노래로 자주 흥얼거리는 찬양인데 3절입니다.
3.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 주셨네
<후렴>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히 한결같은
주 예수께 찬양합시다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시다.

온갖 더러움과 추악함 그리고 이기심과 의심이 가득한 흙탕물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하나님이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절입니다.
1: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 오심을 보시더니
이것도 다른 복음서와 달리 아주 간단하고 간결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는 장면인데 여기에 보면 두 가지의 신비한 현상을 예수님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하늘이 갈라진 것을 본 것이고 또 하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내용은 간단하고 간결하지만 그 의미는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 ‘하늘이 갈라졌다.’무슨 뜻이겠습니까?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혔던 소통의 문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갈라졌다’는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입니다.
이 말은 하늘을 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하는데 드디어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서 땅으로, 또 땅에서 하늘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선지자이후 지난 400년 동안 닫혔던 하늘의 문이 드디어 예수님을 통해 열리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암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실 때 더욱 구체화 됩니다.
마가복음 15장 37-38절입니다.
15: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하나님의 영역인 성소와 인간의 영역인 지성소, 이 둘을 나누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허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갈라짐’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나타난 신비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본 것입니다.
이 말은 또 어떤 뜻일까요?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성령’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비둘기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8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사건입니다.
창세기 8장 8-12절입니다.
8:8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8: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8:10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8:11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8: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비둘기를 세 번에 걸쳐서 내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심판한 물이 지면에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입니다.
이것을 통해 노아가 알고자 했던 것은 바로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비둘기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동물이 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가득 채워질 새로운 세상이 드디어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물 죽음의 물에서 벗어나 이제는 구원의 영 생명의 영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워질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가 드디어 열렸다는 것을 ‘성령이 비둘기같이’라는 그림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비전과 더불어 예수님은 확실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좋아한다.)”
이 말씀이 예수님에게 들려온 겁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의 음성 뒤에 나오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12절입니다.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여러분 이 말씀 이해가 되십니까?
내가 기뻐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나님이 큰소리쳐 놓고서는 그 아들을 어떻게 하신다고요?
광야로 몰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에덴동산 같고 물 된 동산 같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광야로 매몰차게 내 몰겠다는 것입니다. ‘몰아내신지라’고 번역된 동사 ‘에크발로’(ekballo)는 강제로 ‘몰아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누구에 의해서요?
‘성령’입니다.
‘마귀’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입니다.
이것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진짜 신앙이 무엇인지 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왜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낸 것일까요?
그 해답을 주는 말씀이 그 다음절인 13절에 나옵니다.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광야의 수장은 들짐승과 같은 사단입니다.
사단이 공중권세를 잡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재간이 없는, 그래서 싫든 좋든 사단의 노예가 될 수 받게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시험을 40일간 당합니다.
때로는 구차하게 먹는 문제로, 때로는 세상의 힘으로 인해, 때로는 세상의 권세로 인해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시중을 들더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증거 합니다.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바로 이것입니다.

천사 곧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시중을 받는 자. 누구입니까?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 사건으로 인해 드디어 육신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만천하에 검증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침을 받았던 그 시험이 오히려 마가복음 1장 1절이 증거 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검증하는 계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한다는 말과 검증한다는 말의 헬라어가 같습니다.

연약한 육체를 가진 우리 인간이 볼 때 광야와 같은 현실은 말로다 할 수 없는 시험의 공간이었지만 하지만 하나님이 볼 때 그곳은 곧 하나님의 아들로 검증을 받는 절호의 기회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절대로 잊지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광야는 사단과 짐승들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삶이 암담할 때에도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뒤에는 애굽의 병거가 따라오고,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라 해도 살 길은 반듯이 있습니다.
현실이 사단과 짐승의 영역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성령이 ‘보혜사’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크게 외치는 것입니다.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더 이상 하나님을 등지지 말고 하나님과 벗하여 살라.’
이것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의 참 뜻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를 광야로 내몰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증받은 하나님의 아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
벌써 마지막 주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를 좋아한다.”
라는 이 음성에 붙들려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