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길
시1:1-6절 2007/12/30(주일)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옛날이야기 하나하고 오늘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어느 선생님이 사람 人자 다섯을 써놓고는 제자들에게 해석해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지요.
‘人 人 人 人 人’
여러분처럼 제자들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뜻을 스승이 친절하게 새겨주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어떻습니까? 참 옳은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다운 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선뜻 그 대답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사람답다’
‘~답다’는 접미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일부 체언 밑에 붙어서,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주어진 단어가 가지고 있는 성질과 특성을 자연스럽게 말해주는 것이 ‘~답다’는 접미사의 역할입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답다’느낌이 오십니까?
‘목사답다’, ‘그리스도인답다’대충 느낌이 오지요.
이것이 ‘~답다’라는 접미사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사람답다’는 말은 감을 잡기가 좀 어렵습니다.
여러분 누가 사람다운 사람입니까?
그 해답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으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누가 사람다운 사람인가?
우선 첫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입니다.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자기 배만 불리고 채우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개, 돼지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그 안에 거룩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참 사람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사람이 사람답다’라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그 안에 하나님의‘거룩성’(holiness)
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내주 하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이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참 사람,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번째로 누가 사람다운 사람인가?
함께 살아가는 형제나 이웃에게 책임을 다하는 사람. 즉 이타적인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사건은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입니다.
철천지원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한 부모로부터 한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인 것이 첫 번째 살인사건입니다.
여러분 이것 이해가 되십니까?
성경이란 말 그대로 거룩한 책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성을 해치는 형제 살인사건을 성경에 그것도 성경에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그대로 기록합니까?
일종의 경고입니다.
형제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즉 사람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배타적일 때 나타나는 죄의 결과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동생을 죽인 형 가인에게 하나님이 묻지요.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 때 형 가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지금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가인이 하나님에게 떠넘깁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한 마디로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나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무책임말로 항변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베푸는 그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좋은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참 사람의 두 번째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에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묻지요.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 때 예수님이 이런 답을 주십니다.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습니다.
이처럼 사람다운 사람이란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그리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 참 사람답다’
‘그 사람 참 목사답다’
‘그 사람 참 교회 다니는 사람답다’
이 말 듣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거룩한 도전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시편 1편은 좋은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은 150편 전체의 주제를 요약한 것입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을 여는 열쇠가 시편 1편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 1편에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의미 있는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사람답게 의인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답지 못한 악인의 길을 갈 것인가?‘ 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사람다운 의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는, 말 그대로 복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 의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선택해야 할 의인의 길 3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 정말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결해야할 것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짜트’입니다.
영어로는 counsel, advice 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악인으로부터 카운슬러(상담)를 받고 악인으로부터 어드바이스(충고)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올해에 사자성어처럼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자기기인(自欺欺人)'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
악인은 하나님이라는 스텐다드(기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정한 기준 없이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리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런데도 그 악인으로부터 카운슬러(상담)를 받고 어드바이스(충고)를 받는다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기인(自欺欺人)'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기인(自欺欺人)'에 빠지는 악인의 꾀를 쫒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7장 18-20절을 보면 우리나라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이 이스라엘 왕들의 교육헌장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17: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17: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정말 왕다운 왕이 되기를 원한다면 스텐다드(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등사해서, 복사해서 자기 옆에 놓고 날마다 날마다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준이 분명해야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그 기준이 분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류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 정경을 ‘캐논’이라고 합니다.
그 원뜻은 대나무 자입니다. 기준이지요.
아모스 7장 7-8절에 나오는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이란 건축현장에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실에 추를 매달아 그 중력으로 건물의 수직을 맞추는 것이 다림줄의 역할인데 역시 기준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꾀를 쫒지 않는 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캐논’(잣대)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림줄 삼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분명히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로 우리교회가 개척 된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만큼 우리가 이 사회에 그리고 세상 모든 교회의 기준이 되는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그저 외형적인 성장만을 꿈꾼다면 몇몇 대형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기준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표준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여줄 수 있는 영성이 우리 안에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죄는 히브리어로 ‘카타하’라고하고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입니다.
따라서 죄인이란 ‘목표가 빗나간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상실한 사람이 악인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목표를 상실하고 빗나가게 사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가 걷는 죄의 길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의인의 길입니다.
산상복음이 기록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뼈 있는 말씀 하나를 남기십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왜 우리가 세상이 외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거기에는 작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푯대,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에 들어서면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그 문은 생명의 문, 예수 그리스도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6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영생의 길로 나아가는 그 좁은 문, 그 작은 푯대를 향하지 않으면 결국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 인생의 푯대가 분명히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의인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의인의 길이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오만하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정한 기준과 목표를 거스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만이지요.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반역해서 사탄이 된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면 오만하고 교만한 사탄의 종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한 가지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없다.’
이것이 오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에 보면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오만한 자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것을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1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고, 의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누가 사람다운 사람입니까?
누가 주어진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입니까?
누가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입니다.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길로 삼은 사람이 복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복된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한 해가 다 지나가는 데도 성경 구절 하나가 내 속에 들어와 나의 길이 되지 않았다면 지난 인생을 헛살고 만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별명은 ‘한 책의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서 ‘한 책’이란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슬리 목사님이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기준과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하가’(hagah)의 번역어입니다.
보통 부드럽게 소리내어 있는 것을 ‘하가’라고 하는데 이 ‘하가’라는 단어 ‘묵상’이라는 단어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마치 사자가 자기 먹이를 움키고는 기쁨에 겨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말씀의 향기를 맡고, 씹고, 맛을 음미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혹 여러분 어릴 적 먹었던 자장면의 그 냄새와 그 맛 기억하십니까?
자장면 그릇을 혀 바닥으로 싹싹 핥을 만큼 참 맛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맛있는 자장면 그릇 핥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먹는 것이 ‘묵상한다.’참 의미입니다. 좀 거시기 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 밑바닥까지 핥고 또 핥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사람답다’라는 그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1:1-6절 2007/12/30(주일)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옛날이야기 하나하고 오늘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어느 선생님이 사람 人자 다섯을 써놓고는 제자들에게 해석해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지요.
‘人 人 人 人 人’
여러분처럼 제자들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뜻을 스승이 친절하게 새겨주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어떻습니까? 참 옳은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다운 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선뜻 그 대답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사람답다’
‘~답다’는 접미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일부 체언 밑에 붙어서,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주어진 단어가 가지고 있는 성질과 특성을 자연스럽게 말해주는 것이 ‘~답다’는 접미사의 역할입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답다’느낌이 오십니까?
‘목사답다’, ‘그리스도인답다’대충 느낌이 오지요.
이것이 ‘~답다’라는 접미사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사람답다’는 말은 감을 잡기가 좀 어렵습니다.
여러분 누가 사람다운 사람입니까?
그 해답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으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누가 사람다운 사람인가?
우선 첫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자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입니다.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자기 배만 불리고 채우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개, 돼지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그 안에 거룩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참 사람의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사람이 사람답다’라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그 안에 하나님의‘거룩성’(holiness)
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내주 하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이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참 사람,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두 번째로 누가 사람다운 사람인가?
함께 살아가는 형제나 이웃에게 책임을 다하는 사람. 즉 이타적인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사건은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입니다.
철천지원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한 부모로부터 한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인 것이 첫 번째 살인사건입니다.
여러분 이것 이해가 되십니까?
성경이란 말 그대로 거룩한 책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성을 해치는 형제 살인사건을 성경에 그것도 성경에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그대로 기록합니까?
일종의 경고입니다.
형제와 이웃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즉 사람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배타적일 때 나타나는 죄의 결과에 대한 일종의 경고입니다.
동생을 죽인 형 가인에게 하나님이 묻지요.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 때 형 가인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지금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가인이 하나님에게 떠넘깁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한 마디로 나에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나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무책임말로 항변하지 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베푸는 그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좋은 이웃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참 사람의 두 번째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에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묻지요.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 때 예수님이 이런 답을 주십니다.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습니다.
이처럼 사람다운 사람이란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그리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 참 사람답다’
‘그 사람 참 목사답다’
‘그 사람 참 교회 다니는 사람답다’
이 말 듣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거룩한 도전이라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시편 1편은 좋은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은 150편 전체의 주제를 요약한 것입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을 여는 열쇠가 시편 1편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 1편에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의미 있는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사람답게 의인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답지 못한 악인의 길을 갈 것인가?‘ 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둘 중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사람다운 의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는, 말 그대로 복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 의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가 선택해야 할 의인의 길 3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다운 사람, 정말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결해야할 것이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짜트’입니다.
영어로는 counsel, advice 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악인으로부터 카운슬러(상담)를 받고 악인으로부터 어드바이스(충고)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올해에 사자성어처럼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자기기인(自欺欺人)'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
악인은 하나님이라는 스텐다드(기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정한 기준 없이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리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런데도 그 악인으로부터 카운슬러(상담)를 받고 어드바이스(충고)를 받는다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기인(自欺欺人)'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기인(自欺欺人)'에 빠지는 악인의 꾀를 쫒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7장 18-20절을 보면 우리나라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이 이스라엘 왕들의 교육헌장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17: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17: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정말 왕다운 왕이 되기를 원한다면 스텐다드(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등사해서, 복사해서 자기 옆에 놓고 날마다 날마다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준이 분명해야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그 기준이 분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류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성경, 정경을 ‘캐논’이라고 합니다.
그 원뜻은 대나무 자입니다. 기준이지요.
아모스 7장 7-8절에 나오는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이란 건축현장에서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실에 추를 매달아 그 중력으로 건물의 수직을 맞추는 것이 다림줄의 역할인데 역시 기준입니다.
우리가 악인의 꾀를 쫒지 않는 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캐논’(잣대)삼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림줄 삼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분명히 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로 우리교회가 개척 된지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만큼 우리가 이 사회에 그리고 세상 모든 교회의 기준이 되는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책임을 감당하지 않고 그저 외형적인 성장만을 꿈꾼다면 몇몇 대형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기준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표준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여줄 수 있는 영성이 우리 안에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죄는 히브리어로 ‘카타하’라고하고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입니다.
따라서 죄인이란 ‘목표가 빗나간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기준을 상실한 사람이 악인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목표를 상실하고 빗나가게 사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가 걷는 죄의 길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의인의 길입니다.
산상복음이 기록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뼈 있는 말씀 하나를 남기십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왜 우리가 세상이 외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거기에는 작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푯대,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에 들어서면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좁은 문이지만 그 문은 생명의 문, 예수 그리스도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6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영생의 길로 나아가는 그 좁은 문, 그 작은 푯대를 향하지 않으면 결국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그 인생의 푯대가 분명히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의인의 길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의인의 길이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오만하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정한 기준과 목표를 거스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만이지요.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반역해서 사탄이 된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면 오만하고 교만한 사탄의 종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한 가지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없다.’
이것이 오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에 보면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오만한 자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것을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1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고, 의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누가 사람다운 사람입니까?
누가 주어진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입니까?
누가 의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입니다.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길로 삼은 사람이 복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복된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한 해가 다 지나가는 데도 성경 구절 하나가 내 속에 들어와 나의 길이 되지 않았다면 지난 인생을 헛살고 만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별명은 ‘한 책의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서 ‘한 책’이란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슬리 목사님이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기준과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묵상한다’는 말은 히브리어‘하가’(hagah)의 번역어입니다.
보통 부드럽게 소리내어 있는 것을 ‘하가’라고 하는데 이 ‘하가’라는 단어 ‘묵상’이라는 단어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마치 사자가 자기 먹이를 움키고는 기쁨에 겨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말씀의 향기를 맡고, 씹고, 맛을 음미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혹 여러분 어릴 적 먹었던 자장면의 그 냄새와 그 맛 기억하십니까?
자장면 그릇을 혀 바닥으로 싹싹 핥을 만큼 참 맛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맛있는 자장면 그릇 핥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먹는 것이 ‘묵상한다.’참 의미입니다. 좀 거시기 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 밑바닥까지 핥고 또 핥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사람답다’라는 그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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