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추수꾼
누가복음 10장 1-16절 2006/ 10/ 29주일예배
10:1 이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10: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10: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1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10: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10: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10: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10: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0:14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0: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기억하실 줄 모르지만 2001년 봄 서울 홍제동 다가구 주택에서 화재가 있었습니다. 주택가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화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방관 3명이 심한 중상을 입고 6명이나 숨졌던 대형 참사였습니다.
집주인 아들이 어머니와 말다툼을 한 뒤 홧김에 저지른 방화였다는 점에서 소방관들의 희생을 안타깝게 했던 그런 사고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죽음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집 안에 어린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타는 건물로 뛰어들었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불타는 건물 속에 어린아이가 갇혀있다”
이 울부짖음을 들었을 때 만약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마음 따로 몸 따로 움직였을 것입니다.
마음만 안타까울 뿐이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용감히 불 속으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119 소방대원입니다.
소방대원도 사람인데 불구덩이가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사람인데 왜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 속에 뛰어들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소방대원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방관이라고 다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소방관의 옷을 현장에서 입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든 것입니다.
이처럼 옷이라는 것이 참 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옷을 입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남들보다 좀 늦은 군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작년까지 이기호 선생님하고 같이 예비군 훈련을 받았는데 이 예비군 훈련복이라는 것이 참 묘합니다.
예비군 훈련복만 입혀 놓으면 하향 평준화가 됩니다.
장교출신이고 목사고 스님이고 없습니다.
하는 짓이 거의 강아지 수준입니다.
그러다가 일상으로 돌아와서 양복을 입으면 다시 멀쩡해 집니다.
그래서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동일하게 입고 있는 옷이 하나 있습니다.
혹 그 옷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 해답이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형편과 처지만 다를 뿐이지 우리가 입은 동일한 옷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옷’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것을 우리가 다 입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옷을 입게 하셨을까?
두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잘 29절을 봅니다.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힌 이유 두 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곧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이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힌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속해서 29절 하반부 입니다.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곧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이삭을 얻게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이삭과 같은 전도의 열매를 반드시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에게, 이삭에서 야곱에게 이어지는 것처럼 믿음의 대를 반드시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오늘 우리를 통해서 지금 여기에 보이는 이 빈자리를 하나님이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을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을 주신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 빈자리를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빈 자리가 채워지길 원하시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어주기 원하는데 이 사명을 감당할 만한, 여기에 충성을 다할 만한 영혼의 추수 꾼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가 처한 가장 큰 현실적인 위기 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의 불가사의한 일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전도할 생각을 전혀 해 보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지금 이 빈 자리를 채울 추수할 것이 참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도 영혼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추수할 일꾼의 사명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바로 네 자신이 영혼의 추수 꾼이 되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 남에게 미루지 말고 더 이상 남에게 핑계되지도 말고 영혼의 추수 꾼이 되는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영혼의 추수 꾼으로써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3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는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하는 눈이 열려야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 이유는 영적인 존재만이 하나님과 화목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제일 먼저 비는 말이 ‘평안’이라는 말입니다.
10: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10: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이처럼 하나님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오직 영적인 존재인 인간뿐입니다.
그래서 영이 없는 짐승에게는 전도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이 맞는다면 짐승에게도 전도해야 됩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있다면 인간보다 나은 짐승이 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인간 보다 나은 짐승에게 전도해야 됩니다.
그러나 짐승에게는 전도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 이유는 아무리 사람보다 나은 짓을 한다 할지라도 짐승은 짐승이지 인간처럼 영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주의에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마치 짐승처럼 영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개, 돼지와 같은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도 전해야 합니다. 6절입니다.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복음을 받아들이면 다행이지만 설사 복음을 거부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그 거부한 평안의 축복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나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의 축복을 축복의 으뜸으로 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은 면 그것이 곧 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영혼의 추수 꾼인 우리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추수 꾼이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탕자가 후회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탕자가 자신 자신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군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당시 ‘품군’은 종을 말합니다. 종은 개, 돼지와 동격입니다.
한 마디로 나는 개, 돼지만도 못한 ‘품군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가 돼지나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는 말 그대로 개, 돼지만도 못한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를 어떻게 봅니까?
개, 돼지와 같은 품군의 하나로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5장 21절입니다.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누가 뭐라 해도 아버지는 이 탕자를 아들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모든 탕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 또 구원 받을 만한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영혼의 추수 꾼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이기 늑대가 아닙니다.
여자는 여자이기 여우가 아닙니다.
사람을 결코 짐승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방송을 보다가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 방송 프로그램이 진행된 이후 최악이라고 할 만큼 아주 큰 충격적인 사건인데 다운증후군 자식을 무려 26년 동안 우유만 주면서 창고와 같은 집에 가두어 키웠던 부모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부모의 형편과 처지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영적인 존재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의 무지가 26년간 한 영혼을 방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의 대한 무관심으로 우리의 자녀를 우리의 남편과 아내를 우리의 형제와 이웃을 세상이라고 하는 감옥, 죄에 감옥에 가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 줄 모릅니다.
전도를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요?’
세상에 원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편견이 곧 구원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는 눈이 띄어져야 합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품군’이 아니라 아들로 본 것처럼 오늘 우리도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는 눈이 먼저 열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영혼에 대한 자비 즉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혼의 추수 꾼이 가져야할 두 번째 조건인데 오늘 본문이 기록된 누가복음 10장 후반부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이것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잃고 거반 죽게 됩니다. 그 때 거반 죽게 된 강도만난 자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이 어떻게 합니까?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갑니다.
이것을 성경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절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 모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다고 이런 말을 들으면 제 자신이 뜨끔해 지는 것이요.
이번에는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 인이 그 길을 지나갑니다.
이 레위인은 어떻게 합니까?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그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도 알고 말씀도 아는 대제사장과 레위 인이 왜 강도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갑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사람은 어떻습니까?
10:33 어떤 사마리아 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돌보아 줍니다.
그래서 주님이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
이것이 영혼의 추수 꾼이 가져야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영혼의 추수 꾼은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실천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복음의 신을 신고 이제는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복음 전도의 결과를 제자들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10:17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무슨 말입니까?
나가서 전해야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음만가지고 발만 동동 구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눈으로만 하고 마음으로만 합니다. 발이 없어요.
제가 우리 교회를 볼 때 참 안타깝게 여기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는 눈도 열린 것 같고, 영혼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는 것 같은데 복음의 신을 신은 발이 없어요.
전도의 발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정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낫고, 마음 좋은 사람보다는 손 좋은 사람이 낫고, 손 좋은 사람보다는 발이 좋은 사람이 더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더 낫고요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보다는 섬기는 손을 가진 사람이 더 낫고요
섬기는 손을 가진 사람보다는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영혼에게 달려가는 발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강도만난자의 손발이 되는 것 이것이 영혼의 추수 꾼이 가져야할 마지막 조건입니다.
말씀을 마찹니다.
설교 후에 부르게 될 찬송가 258장 후렴을 미리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속에 빠져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
여러분 손에 생명 줄이 있습니까?
그러면 지금 던지세요. 발만 동동 구르지 말고 그냥 던지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물 속에 빠져가는 자식에게 던지고 남편과 아내에게 던지고 형제와 이웃에게 던지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손에 추수할 낫이 들려 있습니까?
그러면 영혼의 추수를 위해 낫질을 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바라기는 이 구원에 역사에 함께할 수 있는 영혼의 추수 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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