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약3:13-18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12/9)

心貧者 2007. 12. 15. 19:55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약3:13-18절                                                           2007/12/9(주일)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오늘도 교회의 절기인 교회력으로 말씀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교회 절기상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대강절 둘째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이 대강절이 시작되는 대강절 첫째주일이고 오늘은 그로부터 한 주가 지난 대강절 둘째주일인데 대강절, 무슨 날입니까? 뭐하는 날입니까?

연말회식이나 하면서 대강 대강 보내는 날입니까?

 

대강절(待降節), 다른 말로는 대림절, 강림절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초래하다, 도래하다는 뜻의 ‘advent’라는 단어를 쓰는데 한자로는 기다릴 대영접할 대(待), 내릴 강자(降)를 써서 대강절이라고 합니다.

대강절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초림인 성탄절을 기다리고 영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재림함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나라를 기다리고 영접하는 것이 대강절입니다. 좀더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다리고 영접하는 날이 대강절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에 핵심이 담겨져 있는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우리민족이 지키는 24절기는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이 일년 중 가장 눈이 많이 온다는 대설이고 오늘부터 시작해서 보름후면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고 하는 동지인데 그 기준은 농사의 가장 근본이 되는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해서 정한 것입니다.

농사의 근본인 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해서 정해진 절기가 우리민족이 지키는 24절기라면 교회의 절기인 교회력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기준이고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중심으로 짜여진 것이 교회력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절 그리고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공증(公證)받은 것을 기념하는 주현절,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는 사순절,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다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다리는 대강절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력을 우리가 기념하고 지키는 것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정한 구원의 길을 깨닫는 것이고 또 하나는 깨달은 그 구원의 길을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걷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교회력과 교회의 존재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상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양육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온전하고 성숙한 인격을 지닌 자녀로 키우려고 애쓰며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어머니인 교회 역시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성장하여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수고하고 기도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겉모습은 그럴듯하고 요란한데 본질이 희미하지요.

절기의 형식만 남아있지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는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자신의 믿음만이 최고이고 자기의 교회만이 으뜸이라고 설치고 나데는데, 정말 그럴까?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야고보가 우리에게 남긴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야고보가 말합니다.

13절입니다.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의미 있는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이 시대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는 반문입니다.

서로 자기가 잘 낫다고, 똑똑하다고 설치고 나대는데 누가 지혜와 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

이냐는 것입니다.

저도 한번 묻지요.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누가 총명한 사람입니까?

총명하다는 말은 귀가 밝아 이해력이 풍부하다는 말인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지혜가 있고 이해력이 풍부한 사람입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현실 속에서 누가 하나님의 때 곧 구원의 때를 감지하는 예민함, 총명함이 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야고보는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입학 시즌이지요.

하지만 대학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저는 가슴이 답답함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대학으로서 구실을 못한지가 벌써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이란 말 그대로 큰 배움이 있는 곳입니다.

지혜와 총명을 얻는 큰 배움이 있는 곳이 대학입니다.

유교경전인 <大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大學之道(대학지도)는 在明明德(재명명덕)하며 在親民(재친민)하며 在止於至善(재지어지선)이니라”.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大學,큰 배움의 길이란 在明明德,하늘이 내린 맑은 마음인 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고, 

在親民,그 덕으로 사람들을 가까이 하며 在止於至善,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감화시키고, 지극히 선한 자리에 머무는 것.

이것이 대학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 어떻습니까?

고시공부하고 공무원시험 준비하고 취직 공부하는 곳으로 전략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디에서 큰 배움을 얻을 만한 곳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공부는 대학입시, 취직 공부가 아니라 마음공부입니다.

스스로 선한 자리에 머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지혜와 총명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공부는 세상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을 자꾸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보며 닦아내야 합니다. 

옛날에 어른들은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광 속에 넣어두었던 호리병 모양의 큰 남포(lamp)을 내다가 그을음을 닦아 다시 걸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깨끗했던 우리 마음에도 그을음이 앉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이 말하는 것처럼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그름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발할 수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윤동주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을 부끄럽게 돌아보다가 마침내 자신의 시 ‘참회록’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손바닥도 부족해서 발바닥으로라도 닦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절박감.

이것이 있어야 배움의 길을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독한 시기와 다툼이 목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함을 느낍니까?

아니면 죄의 굳은 살 때문에 아무 감각이 없습니까?

불편함을 느껴야합니다.

목에 박힌 가시처럼 독한 시기와 다툼에 불편함을 느껴야 합니다.

시인 윤동주처럼 밤이면 밤마다 내 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닦아보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게 우리 마음입니다. 

깨끗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또 다시 저 깊은 곳에서 악한 것, 더러운 것이 올라오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신의 편지인 로마서에서 이런 탄식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입니다.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반성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맑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혜)이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켜 ‘위로부터(하나님으로부터)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이 말하는 ‘아노덴’거듭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다시’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거듭남, 하나님으로부터의 거듭남을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위로부터 난 사람을 가리켜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히6:4)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성령의 비췸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가야 할 길도 알게 됩니다. 

이런 이를 가리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정한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 걷는 사람.

그가 바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총명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늘 ‘한다’ 하는 사람들 ‘안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생합니다. 

그들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억지를 부립니다. 

예수님이 가장 경계하셨던 것은 ‘자기의 의’(self-righteousness)입니다.

그런데 너나할 것 없이 ‘나만 옳다’고 떠듭니다.

최근에 가장 큰 사회적 이유는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의 진실과 BBK 사건의 진실입니다.

누구의 말이 참이고 거짓인지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대표적인 엘리트들이 그 거짓말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돈과 권세와 그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양심과 자기의 생명과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팔고 있다는 것.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지은 ‘수오재기’라는 책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땅도, 집도, 동산의 나무도, 책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잃었다가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하에 잃기 쉬운 것이 ‘나’라고 합니다.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 집 주인이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지 않습니까?

야고보는 이처럼 나의 양심과 나의 생명 곧 나의 나 됨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지혜를 가리켜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지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

맞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듯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지혜와 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혜와 총명의 뿌리가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라면 악하고 더러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한 열매는 결국 사람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죽음의 역사가 아니라 살림의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와 총명을 구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그 지혜를 주십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자 유대 사람들이 놀라며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요7:15) 

그렇습니다.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특징입니다. 

마가복음 13장 11절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지금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상황에 따른 재빠르고 유리한 판단이나 경험이 아닙니다.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하늘의 뜻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부터 난 하늘의 지혜를 주시는 까닭입니다. 

바로 의의 열매, 생명의 열매 구원의 열매를 거두기 위함입니다.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첫째는 성결(순결)입니다.

그리고 화평이고 관용이고 양순이고 긍휼입니다.

이런 열매가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으로 나타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위로부터 난 하늘의 지혜를 준 까닭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鑑於人)’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자신의 모습을 물에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어 보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는 부경어수 경어인(不鏡於水 鏡於人)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같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지 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거울로 삼을 때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비친 자기 모습이야말로 솔직한 자기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요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묻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비치는 거울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일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에서 깊이 있는 질문하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의 지혜와 총명함으로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의의 열매, 구원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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