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시편 13편

心貧者 2019. 10. 21. 09:04

성령강림 후 제 181015() 새벽묵상말씀

 

시편 13

 

인간에 대하여 언급한 최초의 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1장입니다.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런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육체의 생명) 번성하여(자손의 축복) 땅에 충만하라(땅의 축복 열방의 축복).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생육(육체의 생명)과 번성(자손의 축복)과 충만(땅의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인 주인공이지요.

그래서 복의 근원을 우리가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죄가 이 모든 것을 단절시킵니다.

죄가 생육(육체의 생명)을 단절시킵니다.

죄가 번성(자손의 번영과 축복)을 단절시킵니다.

죄가 충만(땅의 축복)을 단절시킵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고달픈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이 이런 상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삶이 주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따지듯 묻고 있습니다.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2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여기에 보면 시인을 괴롭히는 현실,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나의 이 비참한 처지를 하나님이 지금 외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입니다.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셋째, 악인 곧 원수들의 번영입니다.

오히려 죄 지은 자들이 내 앞에서 의기양양하고 승승장구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인의 삶은 아주 심각하게 뒤틀려 있었습니다.

꼬여도 보통 꼬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이 당하는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그 원인을 모두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아, 모든 불행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인은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의 부재不在로 돌립니다.

내가 너희와 늘 함께 하겠다.’라는 그 임마누엘의 언약을 하나님 자신이 어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지 1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호칭이 아주 간결하고 무미건조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간결하게 여호와(Yahweh)’로 시작됩니다.

섭섭함에 대한 표시이지요.

 

그런데 3절로 넘어가 보세요.

3절을 보시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완전히 바뀝니다.

어떻게 바뀝니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Yahweh my God)으로 바뀝니다.

여기서 핵심은 나의 하나님(my God)’입니다.

1절과 2절에서 지나칠 정도로 간결했던 일상적이고 냉소적인 호칭이, 3절에 와서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my God)’라는 다소 따듯한 호칭으로 바뀝니다.

 

도대체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신의 한계를 자각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해결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에 대한 자각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주도하시고, 움직이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자각입니다.

그것도 완전하게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3절에서 이전에 어조와 다르게 하나님을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라고 친근하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 시인은 자신의 믿음을 담아 전능하신 하나님께 세 가지를 간구합니다.

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첫째, 나를 생각하사(나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둘째, 응답하시고(나에게 응답하여 주십시오)

셋째, 나의 눈을 밝히소서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여기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기도는 세 번째입니다.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바로 이 기도입니다.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면,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왜 이 기도가 중요한줄 아십니까?

그래야 너그럽게 대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 비로써 보입니다.

그래야 여호와 이레앞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이 비로써 보이게 됩니다.

그래야 여호와 닛시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승리의 하나님이 비로써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땅의 현실 곧 우리 인간의 아픔에 민감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땅에서 들려오는 언약한자들의 신음 소리, 그 거친 숨소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턱까지 차오르는 우리의 거친 숨을,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결코 우리의 숨을 막히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시인은 이런 고백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13: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할린 열도로, 그리고 중앙아시아 있는 러시아 오지로 끌려갔던 고려인들을 우리는 카레이스키라고 부릅니다.

카레이스키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사말이 에이, 숨채요.”입니다.

에이, 숨채요.” 그 뜻은 이렇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숨차도록 고맙다

까레이스키의 삶이 이 인사말 하나로 다 설명될 수 있을 만큼 이 인사말은 정겨움과 처절함이 함께 묻어납니다.

 

요즘 숨차십니까?

그러면 우리 주님이 불어 넣어 주시는 생명의 숨, 곧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거친 숨을 성령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 숨 돌리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열린 것입니다.

숨차다고 혼자 아등바등하지 말고, 성령이 역사하실 때까지 기도하고 찬송하고 또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을 멈추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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