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 있다
요한복음 3장 1-3절 2014/3/28(금)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인적이 드문 한밤중에 유대인의 고위 관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은밀히 찾아옵니다.
요한복음 3장입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네모가 거두절미하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3:1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선생님이 행하셨던 표적, 표적을 그리스어로 ‘세메이온’이라고 합니다.
당신이 행하셨던 ‘세메이온’, 그 표적을 볼 때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메시야 곧 우리가 기다렸던 ‘그리스도’라는 것이 니고데모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출신 무명의 전도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은밀히 찾아온 것으로 봐서 자신의 판단에 확신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을 바라보는 니고데모의 안목, 어떻습니까?
매섭지 않습니까?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을 이렇게 정확하게 바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표적들을 보았지만 니고데모처럼 정확하게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메시야)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임마누엘)이라고 설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관원인 아마도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이 택하여 보내신 선지자요,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본 것입니다. 대단한 안목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이런 답을 줍니다.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네, 이 말씀만 볼 때는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대화, 어딘가 모르게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니고데모와 예수님, 예수님과 니고데모 이 둘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의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색해도 보통 어색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니고데모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에 대한 관점과 예수님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란 율법의 사람, 하나님 말씀에 충실한 사람,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왕국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고위직 관리입니다.
70명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의 한 사람입니다.
로마 제국의 압제 속에서 신음하는 자기 민족을 대변하는 정치지도자요, 종교지도자입니다.
그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입니다.
통일이 대박인 것처럼 그에게는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 대박입니다.
로마로부터 독립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민족주의자, 늘 이스라엘의 독립을 품고 산 사람이 니고데모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좀 깊이 생각해 봅시다.
니고데모가 바라 볼 때 만약 자신의 판단대로 이 젊은 유대인 청년 예수가 메시아가 맞는다면, 이 니고데모는 어떤 메시야를 원했을까요?
철저하게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무력이든 외교적인 수단이든 아니면 어떤 방법이든지 간에 제국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그 옛날 다윗 왕국과 같이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을 세울 수 있는 메시아로 판단해서 예수님을 아주 은밀하게 찾아 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생각이나 그의 비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로마의 압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식민지 백성이었지만 이스라엘 곧 이 땅에 세워진 나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제국 로마로부터 독립했다 할지라도, 또 다른 제국, 또 다른 압제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은 입은 ‘암하레츠(땅의 사람)’ 민중들의 삶은 늘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삶과 형편이 이 땅의 것으로는 나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답을 준 말씀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 속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나라, 새이스라엘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그의 자비하심이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선민사상처럼 어떤 특별한 자격이 주어진 자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러니 니고데모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이 어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주신 예수님의 답변 다시 한 번 볼까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들어갈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 담긴 속뜻이 무엇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시지요.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면 수사법 중에 하나인 도치법을 한 번 사용해 봅시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이것을 도치하면 이런 문장이 됩니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현재형). 사람은 거듭난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보는 믿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하는 간구가 곧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첫 번째 길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독립하고 이전에 누렸던 다윗 왕국의 영화가 회복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원했던 것처럼 새 사람이 되거나 참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형상, 즉 생명의 가치 회복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 사랑의 회복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의 눈입니다.
우리의 눈이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이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진리의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역사의 주인이 사람이고 그 사람의 힘에 의해서 역사가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까지도 알고 계시는 분, 그분에 의해서 이 땅의 역사는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은 누구의 것?
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하나님이 얼마든지 존중해 주십니다.
그런데요.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내 인생의 속까지 알고 계신분이 있다는 사실, 누구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변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삶의 어떤 기적, 어떤 역사가 필요하십니까?
먼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소망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의로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에게만 여러분의 모든 소망을 두시고, 유일한 소망이신 그분에게 간절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움직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산더미 같은 문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권능이 없는 무익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먼저 바라보는 자 그분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고 이 반에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아계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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