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잔치
마태복음 22:1-14절 2014/06/15(주일오후)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신랑 신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의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자신의 종들을 통해 초청할 명단을 추려서 초청장을 돌리게 됩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임금으로부터 받은 초청장, 어떤 느낌일까요?
적지 않은 부담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나를 초대했다는 특별함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장을 받은 이들, 그들은 분명 선택함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드디어 초청한 날이 이르자 임금은 다시 자신의 종들을 보냅니다.
마침내 그 날이 왔으니 ‘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아주 친절한 임금은 일일이 인편을 통해 재차 초청을 합니다.
그런데요.
참 이상하지요. 그 반응이 좋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초청인데도 반응이 썩 좋지 않습니다.
임금의 아들이라 함은 곧 차기 임금입니다.
권력의 후계자이지요.
임금이나 권력의 후계자에게 눈 박에 나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이상한 것은 초대받은 사람들 하나같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임금도 무엇인가 좀 이상했던 모양입니다.
착오가 있어나 아니면 오해가 있는가 싶어 임금은 아주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다시 초대를 합니다. 4절인데 새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all things are ready),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음식을 다 차렸으니(all things are ready)’, ‘모든 준비를 다 마쳤으니’ 부담 갖지 말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이상한 것은 초대 받은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임금의 종들을 잡아 모욕을 주더니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임금에 대한 반역이지요.
22:5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다행한 것은 이 일이 현실이 아니라 비유에 등장하는 하나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왠지 이 비유는 듣는 이들로 하여금 아주 불길한 느낌을 줍니다.
비유라고는 하지만 이 비유를 듣는 당시 유대인들 특히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 비유는 아주 부담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모욕을 주고 죽인 일들이 자신의 행동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자비한 임금을 모욕하고 욕되게 하는 이들로부터 그 어느 누구도 자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비유를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거절당한 임금의 비애입니다.
임금님의 비애, 얼마나 컸을까요?
4절에서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라는 말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그는 참 자비한 임금입니다.
백성들의 아픔, 백성들의 부담감, 백성들이 처한 현실, 너무나도 잘 헤아리고 있는 임금입니다.
자기 백성을 정말 끔찍이 사랑한 임금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부담도 주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잔치를 준비해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요.
돌아온 반응은 예상 밖에 거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거절당한 임금의 비애, 얼마나 컸겠습니까?
여기서 또 하나 집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특징입니다.
사실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21장에 나오는 두 가지 비유, 즉 '두 아들의 비유'와 '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더불어 3부작으로 구성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처럼 마태복음 21장과 22장에 나오는 3가지의 비유 즉 '두 아들의 비유', '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왕실 혼인잔치의 비유’ 역시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옴니버스식 비유입니다.
다양한 비유를 엮어서 한 가지의 주제를 나타내는(강조하는) 문학구조 양식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등장하는 두 아들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32절입니다.
저처럼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맏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하고는 실제로 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싫다고 분명하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생각을 바꿔서 일하러 갑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자일까요?
21장 31절입니다.
21: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예비자로 먼저 온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당시 세태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1장 33-46절입니다.
아주 정성들여 포도원을 가꾸던 집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소작을 준 것입니다.
드디어 수확 철이 되어서 소작료를 받으려고 자신의 종들을 보냅니다.
그런데요 이게 왼 일일입니까?
소작료를 띠어 먹는 것도 모자라 주인의 종들을 붙잡아서 때리더니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보다 못한 주인이 이번에는 종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도 소작농들은 그 아들마저 포도원 밖으로 내쫓더니 아예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2장 왕실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3가지의 비유, 여기에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거절' 혹은 '거역'입니다.
자비함에 대한, 긍휼 대한, 사랑함에 대한 거절과 거역입니다.
다시 혼인잔치의 비유로 돌아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초대받은 이들, 백성들은 왜 임금의 초대를 거절했을까요?
도대체 무슨 힘이 임금의 자비까지 거역하게 했을까요?
이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서 조금 형태는 다르기만 누가복음 14장 16-24절 나오는 병행비유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과 달리 잔치를 베푼 사람을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드디어 잔치 날이 되어 종을 보냅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 같이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잔치 자리에 오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얼마 전에 밭을 샀기 때문에 가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겨릿소 곧 쟁기를 끄는 소 다섯 쌍을 샀기 때문에 그것 시험하러 가야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장가 간지 얼마 되지 않아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궁색한 변명이지만 나름대로 적당한 핑계를 대면서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실 혼인잔치 비유는 아주 심각합니다.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마치 작당이라도 한 것 같이 행동을 일치합니다.
3절에서는 그들이 '오기를 싫어하거늘‘이라고 다소 평이하게 말하지만, 5절을 보면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전합니다. 아예 듣는 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한 무시이지요.
그냥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임금의 종들을 붙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의 예언처럼 자기 백성에게 무시당하고 버림당할, 앞으로 있을 자신의 처지를 예수님은 지금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욕당한 임금, 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이겠지요.
아버지로서, 하나님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버지의 권세, 하나님의 권세가 무엇인지를 자기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행하십니다.
첫째, 먼저 초대 받은 이들, 즉 혈통적 이스라엘에 대한 자격을 박탈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혈통적 언약의 파괴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무자격을 선언하십니다.
8절입니다.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혼인 잔치에 들어갈 혈통적인 이스라엘의 자격을 박탈합니다.
그리고 곧 바로 새로운 이들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초대입니다.
9절입니다.
22: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네거리’라 함은 사방은 말합니다.
온 누리 온 세상입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모든 이들에게 천국 찬지에 참여하는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리 중에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무자격자가 섞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11절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입니다.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잔치, 그 자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입니다.
그 나라는 남녀의 차별이 없고, 빈부의 차별이 없고, 인종의 차별도 없습니다.
어떠한 차별도 없는 곳이 하나님 나라, 천국잔치입니다.
그런데 11절과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어느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 하나님 나라, 천국 잔치이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혼인 예복입니다.
혼인 예복, 보통 이것을 성령으로 해석합니다.
성령의 옷, 물론 그릇된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정부분 맡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마태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천국 잔치에 들어 갈 때 입어야할 혼인 예복은 무엇일까요?
바로 ‘의’라고 하는 '선한 행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입니다.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선한 행실, 곧 의의 삶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을 훗날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서 ‘그리스도의 옷’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옷’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것들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입니다.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3:12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새번역)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초대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바울 사도처럼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을 만큼 훈련하고 또 훈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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