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예레미야 17:19-22 안식일- 삶의 조율

心貧者 2019. 1. 11. 14:00

안식일- 삶의 조율

예레미야 17:19-222014/8/10(주일오후)

17:19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17: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7: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17: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살다보면 어떤 예감에 사로잡힐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언자(선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어떤 특별한 계시나 초월적인 능력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예감(예지력)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요?

특히, 불길한 예감은요?

, 거의 들어맞습니다.

어떤 특별한 예지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길한 예감은 거의 들어맞습니다.

일반적인 예지력이지요.

 

구약시대로 돌아가 봅시다.

구약시대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책임을 망각하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위기의 본질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일반일과 다르게 좀 특별한 예지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언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로 여겼던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민족, 그 민족에게 닥칠 위기의 본질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정확한 진단입니다.

둘째, 민족의 위기를 알아차렸다면, 그에 따른 바른 대안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 올곧게 그리고 끊임없이 제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정직한 선포입니다.

 

따라서 성서에서 말하는 예언자의 예언이란 위기에 대한 본질과 위기에 대한 대안을 함께 선포하는 것을 우리가 예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점치는 것과 같은 단순한 미래적 예고, 미래적 예언이 아닌, 그 시대의 백성, 그 시대의 민족들이 처한 위기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대안의 말씀이 예언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의 초점은 미래가 아니라 항상 현재,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개인이 아니라 항상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인식하는 예언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그저 미래에 대한 점치는 행위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거론할 뿐이지, 장소가 교회이고 기도원일 뿐이지, 세상의 점치는 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언 기도, 많이 들어 본 말이지요?

성경 어디에 그 근거가 나옵니까?

성경 그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하도 수상해서 그런지 소위 예언 기도라는 것이 교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비성경적이고 주술적인 예언 기도가 오늘 한국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성서 특히, 구약성서에서 말한 예언자들의 예언이란 이런 것입니다.

첫째, 성서의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요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의 초점은 미래가 아니라 철저하게 현재에 있습니다.

둘째, 성서의 예언은 위기에 대한,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유일한 목적은 이런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공동체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다시 변화의 길로, 새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예언함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결코 개인의 흥망성쇠, 길흉화복을 점치는 미래의 일이 아닙니다.

정리되셨지요?

 

성서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민족이 처한 위기의 본질과 그 위기의 대한 대안을 말할 때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 자기의 편견과 생각에 따라 세상을 해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귀 닫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의 예언을 항상 부정적이고 그리고 과격한 돌출행동 정도로 받아드렸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도 마찬가지 취급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가 맨 먼저 본 것은 두 가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는 살구나무 가지였고, 또 다른 하나는 물이 끓는 솥이 북쪽에서부터 넘쳐흐르는 광경이었습니다.

 

우선 111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늘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보았던 첫 번째 환상입니다.

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살구나무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사케드입니다.

그리고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할 때 본다’, ‘지켜보고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쇼케드입니다. ‘사케드쇼케드’, 비슷한 발음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살구나무 가지지켜 본다라는 말이 아무 연관이 없는 단어처럼 보이지만 살구나무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케드지켜 본다는 뜻의 히브리어 쇼케드는 서로 연결된 단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의 직무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란 쇼케드즉 그 시대를 보는 사람’(seer)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사람이 그 시대의 참 예언자입니다.

1: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쇼케드)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사람, 그리고 그 본 말씀을 그대로 지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선포하는 사람이 참된 예언자입니다.

 

그러면 보는 사람으로써 예언자, 예레미야가 본 것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범죄 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범죄 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113-14절입니다.

1: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1: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여기서 예레미야가 본 끊는 가마솥은 제국의 확장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힌 신흥 제국, 바벨론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끓는 가마솥이 지금 어떻게 놓여 있습니까?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이스라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바벨론 제국의 침공이 곧 임박 했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범죄 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재앙, 이러한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릇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런 예레미야의 예언을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의 말씀이 부담스러울 때 마다 사람들은 예언자를 향해 이런 반론을 제기합니다. 특히 그 내용이 부정적이면 더 그렇습니다.

첫째, 아무리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예언자라할지라도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가?

그러지 말고 궁중의 예언자들처럼 백성들에게 편안하다. 좋다이렇게 긍정적으로 예언해도 되지 않는가? 에 대한 반론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너무 자극적이고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재앙이라 할지라도 끊는 가마솥의 물을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붓는다. 이처럼 너무 자극적이고 과격한 표현은 예언자의 품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상을 아주 냉정하게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죄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아주 간명하게 요약했습니다.

9: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9:14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나는 이 백성에게 나의 율법을 주면서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버리고,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고집대로 살고, 조상이 섬기라고 가르쳐 준 바알 신들을 따라다녔다.”(새번역)

 

여기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이 행한 죄의 뿌리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은 거룩한 백성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안전장치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함으로 세상과 다른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구별된 삶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와 거짓 예배가 팽배했고, 이웃을 향한 무자비함은 하늘의 원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의의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행한 죄의 두 번째 뿌리는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도 돌이키지 않고 고집대로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1612절입니다.

16:12 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완악함 곧 자기 고집이 문제입니다.

세상에 고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말한 완악함 곧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사람이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율되지 않는 삶이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이들은 임박한 하나님의 재앙,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예정 된, 파멸로부터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아예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제시한 방법, 대안은 한 가지 무엇입니까?

, 안식일을 안식일답게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17:19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17: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7:2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17: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정말 뜬금없는 대안처럼 보이지만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끓는 가마솥이 기울고 있는데, 지금 재앙이 코앞인데, 주님의 진노가 코앞인데, 한가하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오늘 우리에게 위기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안식일입니다.

그럼 왜 안식일일까요?

성서가 말하는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시작되어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의 시간으로 그날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안식일 규례입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3117절을 보면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할 이유를 아주 흥미롭게 말합니다.

31:17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나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숨을 돌리다’(yinafash)라는 동사입니다.

이 말을 의역하자면 숨을 돌리면서 흐트러졌던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맡게 조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서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람됨을 회복하는 날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키지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안식일, 오늘날에 드리는 주일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흐트러졌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튜닝)을 받아 회복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한 해법에 귀 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흐트러졌던 우리의 삶을 하나님에 뜻에 맞게 조율해 보는 것입니다.

삶이 느슨해졌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좀 조여보고, 삶이 너무 팽팽했다면 이 역시 하나님 말씀 안에서 좀 풀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