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경륜-외인은 없다
에베소서 3:7-13절 2014/8/17(주일)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낯선 지역이나 세계를 여행 할 때마다 드는 걱정이 있습니다.
길을 잃지 않을까, 차편이나 비행기 편을 놓치지 않을까, 거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까, 온갖 걱정이 찾아듭니다. 이 중 가장 큰 걱정은 거친 사람들을 만나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입니다.
잘못 든 길은 돌아서면 되고, 놓친 차편이나 비행기 편은 다시 잡으면 됩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거친 사람들을 만나면 보통 난감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지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삶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의 눈빛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행동까지 거칠지는 않았습니다. 부유한 나라 사람이든 가난한 나라 사람이든 그들도 우리처럼 평범한 행복과 일상에서의 평화를 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이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지만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셨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웃에 대한 책임 있는 계명이 하나님이 정한 여러 계명 중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하루는 모세가 전한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날마다 연구하는 율법학자, 곧 서기관 중에 한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시험하듯이 묻습니다.
마가복음 12장 1절입니다.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관 된 첫째 되는 계명뿐만 아니라 이웃과 연관 된 둘째 되는 계명까지 언급하시면서 이 두 계명이 결코 나눌 수 없는 계명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이라고 강조하십니다.
12: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이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 이전까지 모든 율법의 중심, 모든 율법의 핵심, 율법 중에 율법은 오직 신명기 6장 4절 이하를 근거로 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 4이하를 보십시오.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그 어디에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으뜸 되는 계명의 말씀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이웃에 대한 언급은 십계명 중에 아홉 번째, 열 번째 계명에 나오는 정도입니다.
출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그렇다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우리 주님이 새롭게 만든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레위기 19장에 기록된 여러 계명 중에서 한 부분을 재인용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9장에 기록된 여러 계명들은 출애굽기 20장 그리고 신명기 5장에 있는 십계명을 바탕으로 다시 기록된 계명들입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기존의 십계명과 달리 그 순서가 다르고 강조하는 내용이 좀 다릅니다.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펴보면 좋겠지만 시간상 좀 어렵고,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17-18절입니다.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모세가 전한 여러 계명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 계명 중에 하나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이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으뜸 되는 계명과 같은 무게감을 주십니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은 결코 나눌 수 없는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재해석해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깨달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웃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웃은 곧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거룩함의 모습이 전혀 없는, 거룩함과 거리가 먼 세리의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창녀의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어린아이 과부 나그네, 이방인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 곧 죄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고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아들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사도 중에 가장 늦게 된 자이지만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넘지 못한 이방인의 벽은 바울은 스스럼없이 넘습니다.
로마서 11장 13절의 말씀처럼 스스로 인방인의 사도가 되었다고 선포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숨겨진 비밀의 경륜 하나를 아주 자신 있게 에베소 교인들에게 공개합니다.
바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 절에 나옵니다.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유대인들 즉 유대교 입장에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 그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철저하게 진노의 대상,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 부르며 천시했던 그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는 그들도 유대인들처럼 공동 상속자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한 몸이 되었고,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즉 복음 안에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이라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지배할 때는 율법 아래서 차별이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 즉 복음 안에서는 이방인이라고 해서 그 어떠한 차별도 용납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외인(이방인)은 이 땅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울의 핵심입니다.
바울의 이 주장 어떻습니까?
사실 사도 바울의 이 주장과 가르침은 오늘 우리에게는 당연한 말처럼 생각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당시에 이러한 주장과 가르침은 매우 위험한 발언이었습니다.
특히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고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이 주장은 곧 유대인들의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판에 그들이 자기들과 한 몸이고, 하나님 나라를 함께 상속할 사람들이라....
도저히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과 가르침이었지만 바울은 망설이지 않고 비밀의 경륜에 대한 진실을 밝힙니다.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외인(이방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 우리가 외면했던 교회의 소명을 다시 보게 됩니다.
11절 말씀처럼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을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그 뜻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이웃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자리로서의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가사를 섰는지 누가 곡을 만들어 불렀는지 모르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신앙의 선배들이 불렸던 노래가 있습니다.
이처럼 가난한 이웃 그리고 소외된 이웃과 사랑의 나눔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 아멘이십니까?
아멘, 말로 다짐했다면 이제는 여러분의 손과 발로 여러분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며칠 전 프란체스코 교종이 이 땅을 찾아왔습니다.
굳이 시복식을 광화문 광장에서 해야 하는지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프란체스코 교종의 가르침이 우리교회와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일깨우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습니다.
천주교 역사상 제 3세계 국가인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종이 등장한 것에 대해서 세계의 반응은 걱정 반 의심 반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종이 등장한 것에 대해 많은 주교들과 사제들이 의혹에 찬 시선을 던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적극적으로 교종이 하는 일을 기뻐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를 떠났던 청년들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는 어느 분이 들려주신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란체스코 교종은 교리적인 문제나 신학적인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바로 이 말 속에 우리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이 없는 교리 논쟁, 신학 논쟁, 성경 논쟁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사랑의 손길을 내 미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이웃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내어주고, 이웃이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며, 이웃이 헐벗을 때에 옷을 내어 주고, 이웃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 일이 내 안에서 우리 삶 안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처럼 온전하게 헌실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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