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9:35-38 추수할 것은 많은데

心貧者 2019. 1. 11. 13:54

추수할 것은 많은데

마태복음 9:35-382014/9/21()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교종 프란치스코의 방문을 통하여 남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저는 교회의 재탄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교종 프란치스코가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손을 감싸 쥐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 교회가 잃어버렸던 교회의 참 모습, 참된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 모습, 참된 가치 그것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19절에서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사람들이 살 만한 뭍이 드러난 것처럼 천하의 교회가 한 곳 즉 가난하고 소외되고 낮은 곳으로 모여 사람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가난한 자리, 소외된 자리, 그리고 낮은 자리로 향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언제부터인가 이런 것들이 불편하게 여겨지고 있고 천박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는 점점 높아지고 있고, 점점 화려해지고 있고, 점점 부유해 지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도 그렇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교회의 부흥 때문에 오는 결과물이라고 포장을 하고 있지만 왠지 궁색한 변명 같고 과대 포장인 것 같아 한국 교회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목사로서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오늘은 기독교교육 진흥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청년주일이구요.

무엇인가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할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고민하다 생각 해 낸 답이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교회를 물려준다.’

자칫 엄부렁한 생각일 수 있지만 제가 찾아 낸 답은 교회입니다.

건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신앙의 DNA로 구성 된 교회입니다.

주님의 비유를 잠시 빌린다면 소금과 빛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교회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그리고 우리 믿음의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믿음의 선배 중에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계십니다.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아주 굴직한 신학자입니다.

이 분이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다'

좀 거창하지요.

하지만 그 내용은 아주 단순합니다.

품지 못할 사람이 없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난이라는 경계선, 소외라는 빗금이 없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경계선을 허물고 남자와 여자라는 빗금을 지으면서 한국교회가 시작된 것처럼 그 전통이 계속해서 이어 나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은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경계선 가로지르기'(crossing the border)입니다.

경건한 자와 경건하지 못 한자 즉 종교 안에 처진 성과 속이라는 경계선을 가로 지르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경건한 바리새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제사장, 사두게인, 열혈당원, 세리, 창녀, 심지어 문둥병자, 사마리아 여인, 이방여인까지 그 만남의 경계가 없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둘째로 우리 주님이 하신 사역은 '빗금 지우기'(erasing the oblique)입니다.

경계선 저편에 있는 특권, 즉 기득권이라는 빗금을 지우신 분이 우리 주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향하신 곳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되고 낮은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기득권이라는 빗금을 넘지 못한 이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은 명사보다는 동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 관념보다는 사랑의 실천이 주가 되는 삶이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 주님은 언제나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처럼 그리고 우리 주님을 따르는 제자답게 살고 있는지요?

언제나 아픔이 있는 곳으로 찾아오신 주님처럼 그렇게 우리 인생의 방향을 틀고 있는지요?

아니면 우리 예수님을 자꾸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으로 만 상정하고 짝사랑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 번 깊은 자기 신앙의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 주님이 사람들을 부르실 때 마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입니다.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주님을 따른다는 그 행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 된 우리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주님의 사역을 살펴보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입니다.

 

 

35절입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가르치시며'(teaching), '전파하시며'(preaching), '고치시니(healing)‘

이 세 단어가 눈에 띕니다.

가르치신 교육 사역, 전파하는 복음전도 사역, 그리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는 치유사역입니다.

 

이 세 가지의 사역 중 이 땅에서 행하셨던 예수님의 중심 사역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고치시니(healing)‘라는 치유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율법답게 재해석하는 가르침의 사역 그리고 천국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는 복음전도 사역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사역의 기초는 이 땅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치유 사역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치유 사역을 통한 구원의 역사, 자유함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는 율법에 대한 가르침도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파함도 그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치유 사역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다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마가복음은 가르침의 교육 사역을 강조하고(6:6), 누가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복음 전도 사역(8:1)을 강조하는 반면, 마태는 치유사역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역의 순서를 가르침에서 전파함으로, 전파함에서 치유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병행본문인 마태복음 4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1)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헬, 그 나라의 복음을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그래서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8장과 9장에 치유 사역에 대한 기록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8장 나병환자의 치유, 가버나움 백부장 하인의 치유, 베드로 장모의 열병치유,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두 사람의 치유, 9장 침상에 누인 중풍병자의 치유,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의 치유, 야이로의 딸 치유, 맹인 둘과 말 못하는 사람의 치유 등 집중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강조하고자 하는 마태의 의도입니다.

 

치유.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부분을 고치고 싶은 것이었을까요?

첫째는 노소스(nosos), 일반적으로 몸에 생기는 온갖 병입니다.

객관적으로 누구나 진단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모든 병적 증상을 말합니다.

질병. 여러분, 질병에 걸리면 우리의 삶의 질이 어떠합니까?

질병이 걸리면 우리 삶의 질이 현저히 떨어뜨립니다.

삶의 활기(bios)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애써 유지하고 있는 삶의 질서(nomos)또한 파괴되고 맙니다.

당사자만이 아니라 가족들의 삶 나아가 공동체의 삶의 질마저 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 행하신 일을 보십시오.

마치 그 질병이 자신의 질병인양, 그 고통이 당신의 고통인양 여기시고 그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가서 고쳐주십니다. 그 내용이 8,9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고치신 고치심의 대상은 약한 것입니다.

마카리아(makaria), '아픔'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해석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마카리아(makaria), '아픔'은 객관적인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그래서 누구나 싶게 알아차릴 수 있는 아픔이 아니라 감정적·정서적·영적으로 균형이 무너진 상태를 가리키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아픈 그 사람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자식을 먼저 보낸 이들의 아픔이지요.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입니다. 그 아픔, 마카리아(makaria)를 모르기 때문에 단식하는 이들 앞에서 피자와 통닭과 초코바를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그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아픔을 우선 알아차립니다.

본인 밖에 모르는 아픔을 마치 자신의 아픔인양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공감하시지요.

마치 자신의 일 인양 아주 깊이 공감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고쳐주시기 까지 합니다.

고통의 가스, 절망의 가스가 단 1%도 존재하지 않을 만큼 온전하게 치유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신이 목자 없는 양처럼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의 참된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면서 동시에 그의 아들 독생하신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마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자들을 찾기가 좀처럼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아가는 인생의 고단함을 눈여겨보는 이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악해서인지 아니면 종말의 때여서 그런지 아픔을 공유하고 아픔을 공감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아픔을 조롱하고 그 아픔을 비난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주님의 탄식이 37-38절입니다.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9: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9:38 그러므로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일꾼들을 그의 추수밭으로 보내시라고 청하여라."

 

말씀을 마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주님의 이 피 끓는 탄식이 들리시는 지요?

무정함으로 가득한 오늘 우리 시대를 향한 주님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지시는 지요?

 

저는 이 주님의 탄식이 마치 이명 증상처럼 제 귀에 맴돌고 있어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는 주님의 물음에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6:8)라고 했던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믿음과 자신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침 제가 드리는 기도와 꼭 맡는 복음성가가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할까합니다.

유은성씨가 지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복음성가입니다.

이 찬양 함께 부르시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