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
마태복음 6:9절 2014/8/24(주일오후)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출애굽기 3장 15절을 보면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알려줍니다.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처음으로 알려주시는데 무엇입니까?
‘여호와(개역개정)’ 또는 ‘야훼(공동번역)’입니다.
‘여호와(개역개정)’,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까?
그 이름의 뜻이 출애굽기 3장 14절 전반부에 나옵니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새번역 성경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칠십인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히,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이것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영원한(유일한) 이름이면서 동시에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손대대로 기억해야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것은 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신약성서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신약성서은 단 한 번도 이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서나 그 밖에 책에서도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장 7절입니다.
20: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계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고 결국 그 이름의 음가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 대신 사용된 하나님의 호칭이 ‘아도나이’와 아람어 ‘엘’입니다.
‘아도나이’, ‘엘’ 우리말로 번역하면 ‘주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많이 사용된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주기도문의 병행절인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제자중 하나가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이런 부탁을 드립니다.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세례자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처럼 선생님도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당시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처럼 랍비들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랍비들처럼 선생님도 제자인 우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이라는 뜻의 줄임말입니다.
특이한 점은 당시 유대 사회에 익숙한 호칭인 ‘아도나이’나 아람어 ‘엘’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 사용된 하나님의 호칭은 헬라어 ‘빠테’입니다. 아람어 원어로는 ‘아브(바)’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버지’입니다.
(현대히브리어 아비누 쉐빳 샤마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한 분이 예수님이고 또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 분도 예수님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도 또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아주 의도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훗날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인간 주제에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 그들이 누구입니까?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을 소유하고도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어서 ‘주님, 주님’ 그러다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의 음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부르는 ‘여호와’가 맞는지 아니면 ‘야훼’가 맞는지 그 음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여호와’, ‘야훼’라는 이 호칭도 편이 상 후대의 사람들이 발음 할 수 있도록 기호를 삽입해서 만든 호칭이지, 아직까지 모세를 통하여 알려주신 하나님의 호칭, 그 원래의 음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세상의 아버지, 육신의 아버지 부르듯 ‘아브’, 아버지라 부른다. 이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또 당시 유대인 신앙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브’, 아버지라는 호칭을 아주 의도적으로 고집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54-59절과 10장32-36절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8: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8: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8: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10: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10: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0: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일 그리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 때문에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유대인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저주의 상징은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
이것은 예수님 시대 가히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 또는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이미 익숙한 우리에게는 별건 아닌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아주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이 호칭을 고집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저 남들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아도나이)’,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엘)’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굳이 잘 난체 한다는 비아냥대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을 뭐라고 부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 분명히 ‘아버지’로 나옵니다.
‘주님(아도나이)’, ‘하나님(엘)’도 아니도 ‘아버지(아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호칭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오늘 우리에게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초월성이고 또 하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내재성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다분히 의도적인 호칭입니다.
유대인에 따르면 인간은 땅에 속한 자입니다.
인간 삶의 자리는 하늘이 아니라 이 땅입니다.
땅이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 그래서 하느님, 하나님입니다.
이는 땅에 속한 인간의 격과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땅을 초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늘은 땅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초월이요. 무한함을 뜻합니다.
이런 초월성과 전능성이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능하고 유한한 인간이 감히 초월성과 전능성을 지닌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거룩성, ‘맞다’는 것입니다.
맞기는 맞지만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하는 온전한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호칭을 일부러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처럼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 14번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개인적인 호칭으로 사용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공적인 개념으로 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낼 때 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낼 때 비유로 사용한 정도이지 예수님처럼 비유가 아니라 직접 아버지라고 호칭한 경우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로마서 8:15입니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로마를 비롯한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전통은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그 해답이 마태복음 7장 7-11절에 나옵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 전지전능하신 그 분이, 하늘 위에 하늘에 계신 초월자 그 분이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남의 자식처럼 믿고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없는 자식처럼 신앙의 근본도 없이 세상이 주는 염려와 근심 속에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구하시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기도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분명한 사실은 우리 기도를 지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자식에게 주시는 아버지처럼 좋은 것을 주시고자 준비하고 계신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구원하는 그 날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기도생활을 결코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면 정말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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