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과 화
누가복음 6:20-26절 2014/11/9(주일)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6: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6: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5,6,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듯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살피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 대비하여 누가복음에 기록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평지설교, 그 중에서 첫 대목에 해당하는 부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밤을 새우면서 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이 날이 밝아올 무렵 자기의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아 처음으로 사도라고 부르시게 됩니다.
제자들 가운데 12사도를 선출한 것입니다.
‘사도’, 제자가 배우는 사람이라면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를 지칭하는 단어로 ‘파견된 자’라는 뜻을 가진 apostolos(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apostolos(아포스톨로스), ‘파견된 자’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했던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처럼 그리스도의 예수의 뜻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자, 그리스도의 사신,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사도를 선출한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전위대(친위대)가 조직된 셈입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와 12사도와 함께 평지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큰 무리의 제자들이 다가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유대 백성뿐 아니라 심지어 변방, 이방인의 땅에 해당하는 두로와 시돈 해안 지방에서도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의 증언입니다.
6: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6: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모든 사람을 낫게 하는 치유의 역사.
그리고 더러운 귀신에게 고통을 받은 이들까지 고쳐주시는 회복의 역사.
이것을 목격한 무리가 어찌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아주 큰 기대감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예수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주님은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입말을 여셨습니다.
오늘 본문 20-23절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6: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6: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6: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복이 있다’라고 선포하고 있지만 어딘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20절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21절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22절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 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도
여기에 열거 된 네 가지의 복.
예수님은 이것이 복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어딘가 좀 어색하고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시대에 그리고 오늘 우리 상식에 맞지 않는 복의 내용들이고 영 복 같지 않은 복의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 인자로 말미암아 버림을 받은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니라 12사도로 처음으로 세우신 출정식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대개의 서양말이 그런 것처럼 누가복음을 기록한 그리스어 원어를 번역하면 우리 말 어순과 반대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우선 첫 번째 복만 원어의 순서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복이 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너희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복이 있다'는 선언이 먼저 앞에 나오고 그 대상 혹은 그 이유가 뒤 따라 나옵니다. 이런 어순의 문맥, 어떤 느낌이 듭니까?
‘복이 있다.’라는 이 단언적인 선포가 어떤 강렬한 느낌을 들게 하지 않습니까?
‘복이 있다.’라는 이 단언적인 선포가 반복됨으로 인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결 비장한 느낌을 받게 합니다.
곧 우리가 무엇인가 결심하고 선택해야하는 결단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너무 세속적인 말이 되어 버려서 원문의 뜻을 담아내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복', 그리스어 원어로는 '마카리오스'입니다.
'마카리오스'의 뜻을 좀 풍성하게 하기 위해 우리 신앙의 선배인 김교신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통해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김교신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카리오스'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하는, 내적 환희의 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환경도 지배할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솟아나는 환희, 희열, 행복, 만족, 평안, 안식, 절대기쁨 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풍부한 물질만능시대에 지금 '마카리오스'의 복은 영 복 같지 않은 복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굳이 '마카리오스'의 복이 아니어도 우리가 즐길만한 환희의 샘은 이 시대에 차고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육체의 질병이 왔다고 해서 목사를 찾고나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그냥 동네 근처 대학병원에 가면 됩니다. 이제는 마음이 무겁고 삶이 버겁다고 교회 가서 기도할 마음도 갖지 않습니다. 백화점가서 쇼핑하고 맛 있는 것 먹고 진한 커피 한잔 마시면 풀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이 복으로 들리지 않고 오히려 피하고 싶은 화에 가까운 말로 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회주의자의 비난처럼 종교라는 아편을 통해 가난과 굶주림을 미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가난이나 굶주림을 미화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또 그런 인생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이 선언한 이 네 가지의 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24절 이후에 나오는 네 가지 화에 대한 내용을 배경으로 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새번역입니다.
6:24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6:25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복의 선언처럼 화의 대한 선언 역시 원문에는 '화가 있다'는 구절이 맨 앞에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차례대로 언급되어 잇습니다.
첫째 어떤 사람이 화가 있습니까?
24절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둘째, 25절 '지금 배부른 사람', 셋째 '지금 웃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26절 '모든 이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입니다.
이것 역시 얼핏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복에 대한 내용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뒤에 언급한 네 가지의 화에 대한 내용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러한 삶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문맥이나 문자 그대로 접근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이 말 속에 담겨져 있는 속뜻을 제대로 헤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상력이 조금 필요합니다. 자,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네 가지 화에 담긴 속뜻을 풀어 봅시다.
우선 여기서 부요한 사람이 화가 있다고 한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아마 이런 사람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남을 넉넉히 돕고 가난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행할 수 있는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웃의 고통이나 다른 이들의 불행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지금 배부른 사람‘이란 자기 의만 내세우고 자기 배만 불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셋째, ‘지금 웃는 사람’이란 자기 우월감에 들떠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모든 이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듣기 원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남과 공감할 줄 모르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울 줄도 모르고,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줄도 모르는 무자비한 사람들.
주님은 지금 이런 이들이 화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이기적인 울타리를 넘기 못한 부요함에 대한 경계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즐겨 사용한 말 중에 염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염치, 자기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우리가 염치라고 합니다.
시대가 악해서 그런지 염치없는 지도자들, 염치없는 부자들, 염치없는 지식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어쩌다가 고기를 구워 먹으려 해도 옆집에 누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고기 연기가 담장을 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바나나 하나만 먹어도 옆집의 가난한 이들을 생각해서 그 껍질을 종이에 싸서 버렸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염치가 사라졌습니다.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야 할 교회마저도 염치없는 행동을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교회를 향해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크기를 자기 존재의 크기로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삶이 병든 삶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
슬피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리고 마를 위해 모멸감 당하고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문자적으로 가난함 그 자체가 복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나 명예에 의지할 수 없기에 하나님만을 바라고 사는 이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하기에 가난을 너무 잘 알기에 다른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아팠던 경험이 있기에 지금 고통당하는 이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는 슬피 우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배척하는 진실한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모멸감 당하고 배척받는 사람이 이 땅에서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진정한 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는 것이 참된 복이라는 사실을... 바라기는 이 복을 품고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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