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계시록 10장 8-11 말씀의 맛

心貧者 2019. 1. 11. 13:50

말씀의 맛

요한계시록 108-112014/11/16(주일)

10: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0: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저에게는 아직 채워지지 않는 작은 욕심하나가 있습니다.

어떤 욕심일 것 같습니까?

책에 대한 욕심입니다.

좀 지나칠 정도로 많습니다.

때로는 이미 구입했던 책을 몇 년이 지난 뒤 책 제목만 바뀐 것도 모르고 또 구입하는 어리석은 짓을 종종 범할 만큼 책에 대한 애착, 책에 대한 욕심이 좀 많습니다.

 

저희 집에는 적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살림살이보다 책이 더 많습니다.

큰방, 작은 방, 베란다, 심지어 신발장까지 거의 책으로 쌓여있습니다.

해 마다 봄, 가을로 대청소하면서 적지 않은 책을 버리기도 하고 또 필요한 분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책을 또 사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정말 많은 책들이 넘쳐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한권의 책을 아주 과감하게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성경, 성경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bible’ 입니다.

바이블이란?

원래 그 뜻을 원어적, 사전적으로 풀면 그냥 일반적인 여러 책들(Biblia)’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믿음)의 선배들은 그 앞에 ‘holy’라는 단어를 붙여 성경을 다른 책과 구분하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을 그냥 책이 아니라 ‘holy bible’(거룩한 책)이라고 구분 지어 불렸을까요?

그것은 그 한 권의 책 속에서, 혼돈하고 공허했던 그래서 우리의 어두웠던 마음과 행실이 그 한권의 책으로 말미암아 밝아지고 올곧아지는 변화의 힘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변화입니다. 거듭남, 새 생명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한권의 책 속에는 우리가 정말 가고 싶은 나라, 곧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길이 온전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한 권의 책 속에는 어떠한 환란과 어둠 속에서도 절망치 않는 하늘의 힘과 그리고 우리를 지극히 아끼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 한권의 책을 ‘holy bible’(거룩한 책) ‘성경이라고 구별하여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holy bible’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우리는 더 깊은 행복과 더 깊은 사랑, 더 깊은 거룩함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와 평지설교에서 말씀하셨던 하늘나라로 나아가는 길 그리고 마카리오스의 복 곧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이 한권의 책속에 충분하고 완전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인 24장을 보면, 저자 누가가 누가복음의 결론을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는 안식 후 첫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날 십자가의 처형만을 목격한 두 제자는 실의에 잠긴 채 엠마오를 향해 내려갔습니다. 몇몇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그 분이 부활의 약속을 지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이었고 지난 모든 날이 후회이고 불행이었습니다.

발걸음을 고향 엠마오로 옮길 때마다 그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 때 한 낯선 나그네가 두 제자와 함께 동행 하게 됩니다.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그 나그네가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그 큰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가슴이 뜨거워지고 힘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침에 집에 도착한 두 제자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나그네가 빵을 들어 축사하고 그것을 떼어 주는 순간 그 두 제자는 그 동안 자신들과 함께 동행 하고 이야기를 나눈 바로 그 나그네가 예수님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자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신비한 경험 끝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이런 말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누가복음 2432절입니다.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말씀의 맛.

이것이 초대 교회 교인들이 성령 충만 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증거 하고 싶은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말씀의 맛에 사로잡힌 그리스도 그리고 말씀의 맛을 내는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513절의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으로 가득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의 맛과 새 생명의 맛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 이런 경험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것이 간절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말씀에 대한 간절함, 목마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된 것은 말씀에 대한 간정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절함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니 말씀이 삶으로 변화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랍비들은 성경을 미크라(miqra)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행동하라는 요구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뭔가를 하도록 끝임 없이 요구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인의 랍비들은 성경을 미크라(miqra)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한권의 책 성경은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더 큰 뜻, 더 큰 생명, 더 큰 나라를 헤아리라고 끈임 없이 요구합니다.

이 요구에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 권의 책 곧 성경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요한을 통하여 보여주신 광경입니다.

 

구름에 싸인 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는데 그의 머리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었고, 그의 얼굴은 해와 같았고, 그의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아주 초현실적인 모습입니다.

천사의 오른발은 바다를, 그리고 왼발은 땅을 딛고 서 있었습니다.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 소리로 천사가 부르짖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그 소리에 일곱 천둥도 응답했습니다.

정말 장대한 광경입니다.

 

그때 천사로부터 요한에게 말씀이 전달됩니다.

이제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때'란 역사의 파국을 고하는 지구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이 지배하는 옛 세상 질서의 종말을 말합니다.

거짓된 세상의 종말, 불의한 세상의 종말,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천지개벽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희망인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선포되었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10: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에 대한 중요한 원칙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절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은혜지만 그 은혜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말씀을 가진 그 분 앞에 간절함으로 다가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좀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마음으로 듣고 몸으로 듣고 발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 뜻을 전하시는 하나님과 만나려면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지적 행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처럼 말씀은 사모하는 이에게만 들려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초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천사에게 다가가 그 두루마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요한에게 깨우쳐줍니다. 9절입니다.

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귀로만 듣는 말씀에 익숙했다면 이제는 귀로 들은 그 말씀을 우리 몸으로 받아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맛보고, 그 향기를 음미하며, 우리 삶 속에서 그 말씀을 잘 소화시켜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 역사를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사랑으로...

주님이 베푸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 자비로. 그 긍휼로 우리가 이 병든 땅을 고치고 치유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힘, 그 힘은 우리가 말씀을 받아먹었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한이 받아먹은 말씀의 맛이 어떠합니까?

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씁니다.

이상하지요.

입에는 단데 배에는 씁니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일까요?

우선 입에 달다는 말은 모든 진리의 말씀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옳다는 것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가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도 있지만 그 말씀 안에는 깊은 맛이 난다는 점에서 대개는 달콤합니다. 왠지 그 말씀을 만난 덕분에 우리의 품격이 다소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말씀을 내 몸속에서 내 삶 속에서 소화시키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의 말씀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희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고 살았던 지난날의 삶과 작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나 좋은 대로만살 수 없습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웃을 살리기 위해 정말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 배에서는 그 맛이 씁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살리는 명약 아닐까요?

 

말씀을 마칩니다.

달콤하면서고 쌉싸름한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이 말씀의 맛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아주 부담스러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좋다는 것 다 압니다.

진리의 말씀이고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달콤하면서고 쌉싸름한 하나님의 말씀, 그 맛 때문에 사람들이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의 날선 검처럼 사람들에게 끈임 없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하고 새로운 삶의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1백마일(160Km)을 걸어서 케나다 출신의 미국인 선교사 게일을 찾아왔습니다.

방문 목적을 묻자 이 남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성서 말씀 가운데 얼마를 외우게 되었는데 그것을 보여드리려 왔습니다.’

그러면서 산상설교전체를 한 군데도 틀리지 않고 외워 보였습니다.

그러자 게일 박사가 그에게 한 마디 충고를 합니다.

성서는 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때 그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선교사님 바로 그런 식으로 내가 외웠습니다. 처음에 성서 구절을 외우려 노력했는데 도무지 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한 절을 외우고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했더니 모두 외우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욕심나지 않습니까?

달콤하면서고 쌉싸름한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에 맛에 길들여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