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shall overcome
마태복음 7:24-29절 2014/12/28(송년주일)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제가 어린 시절부터 물 길러먹기 위해 오른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꼽산’입니다.
‘배꼽산’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그리고 동네 아저씨들과 형들로부터 들은 산의 이름은 ‘배꼽산’ 입니다. 어느 때부터 그렇게 부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옛날 산꼭대기에 군사용 봉수대가 있어서 그 모양이 꼭 툭 튀어나온 아이 ‘배꼽’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 같습니다.
후에 그 산을 사람들은 유식하게 ‘문학산, 연경산, 노적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어떤 문헌에 따르면 더 고상한 ‘남산, 진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제 입에 밴 산의 이름은 ‘배꼽산’입니다.
여름에는 물 길러 다녔고, 가을에는 밤 따려 다녔고, 겨울에는 토끼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겨우내 언 땅이 녹고 다시 봄이 오는 길목이 되면 삽자루 하나 들고 칡뿌리 패려 다녔습니다. 거기서 동네 형들 쫒아 다니면서 칼싸움도 하고 총싸움도 하고 작은 동굴에 들어가 불장난도 참 많이 했습니다.
조금 머리가 커서는 산에 올라가 기타 연습도 하고 영어 단어장 들고 가서 단어도 외웠습니다. 머리가 더 켜서는 제 아내와 함께 설레는 연예도 했습니다. 그 산을 제가 이곳에 부임 한 후 딱 한 번 올라갔습니다. 거의 매일 오른 산을 이곳에 온 후는 교회 행사 핑계로 올라간 것이 전부입니다.
아마 제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교회 부흥에 대한 조급함 강박감이 제 삶의 유일한 여유 유일한 취미를 빼앗아 간 것 같습니다.
그 산을 제가 이 한 해가 다가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오를까 합니다.
해질녘쯤에 올라가서 저물어 가는 한 해의 落照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서해의 마지막 낙조를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2014년도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송년주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느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쉬웠습니까? 아니면 참 좋았습니까? 아니면 그저 그렇습니까?
어떠했는지요?
저는 요.
그냥 불편했습니다.
불편한 마음.
그래서 무심한 세월을 그냥 흘러 보낸 것 같지만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을 새롭게 만난 것도 감사하고, 우리 교회와 가정이 탈 없이 지낸 것도 참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주님의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저는 하나님에게 신실한 삶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일에 게을렀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불의 앞에서는 한 없이 무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올 한 해에도 어김없이 받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그래서 감사합니다.
도종환 시인이 쓴 <담쟁이>입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저는 이 마지막 시구가 참 맘에 듭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설교 했던 ‘We shall overcome’입니다.
우리 인생 앞에 놓여진 현실의 장벽.
그 암울한 장벽 앞에서 우리는 마냥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We shall overcome’(우리에게 반드시 승리를 안겨 주신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신실함이 있어서 정말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태복음의 저자는 첫 단어를 '그러므로'라는 종결 접속부사를 강조해서 사용합니다.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7: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사는 삶입니다.
말씀과 삶, 삶과 말씀의 일치입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자신의 몸으로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자 마태가 내린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이 마태의 충고를 따르지 않습니다.
아니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예 생각자체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교회의 어리석은 행태를 본 믿음의 선배, 험석헌 선생님은 ‘씨앗의 설움’ 이라는 글에서 이런 쓴 소리로 교회를 향해 충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말을 입으로 한 것이 아니요, 몸으로 했다. 그래서 자기 말 믿으란 말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했다. 그가 피땀 흘려 한 말씀을 몇 주일 교회에 가고, 몇 해 신학교에 건들건들 다니고는 제 것이나 되는 듯 팔아먹으려는 놈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제 딴으로 조금 얻은 것을 내세워 증거하고, 그 때문에 참이 뭔지 아는 민중이 조금 거기 귀 기울이는 것을 보면 제 편에서 저건 가짜라고 큰소리치는 놈들.
이 충고가 있는지 4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우리 안에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굳이 숫자를 언급하자면 가톨릭 포함 천오백만명이 넘습니다.
매주 천만 이상의 예배자가 교회와 성당을 찾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말씀.
그 말씀을 우리 몸으로 부딪치면서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고백이
우리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테이프처럼 기계적인 고백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7:12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율법과 예언서 즉 모든 성경의 본뜻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본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 몸부림치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 공동체 안에 이러한 분이 2%만 있어도 우리 교회는 지혜로운 교회로 참된 교회로 변화될 것입니다.
2%입니다.
2%가 부족할 때 세상은 교회를 향해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2%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두 종류의 건축가처럼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과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기초입니다.
기초를 반석 위에 두고 집을 짓는가 아니면 기초를 모래 위에 집을 짓는가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건축자라면, 여러분은 어디에 신앙의 집을 짓겠습니까?
반석입니까? 모래입니까?
물론 기계적인 정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반석이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반석위에, 돌덩어리위에 믿음의 집(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가 아직 그런 분 직접 뵙지 못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도한 분은 몇 분 더러 보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반석위에, 돌덩어리위에 믿음의 집(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이 일을 여러분과 함께 해 보려고 겁 없이 덤벼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경제적인 논리로 따진다면 그리고 현실을 바로 직시 할 수 있는 감각만 있다면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도 많이 들고 비용도 많이 들고 수고로운 일들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남들은 번듯한 집을 뚝딱 짓고 편안하게 사는 것을 보면 반석(돌덩이)과 씨름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언제 집을 짓지’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이처럼 반석위에, 돌덩어리위에 집을 짓는 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어지간한 고집이 없으면 할 일이 못됩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언제입니까?
마태는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25절과 27절에서 네 개의 동사를 사용합니다.
'비가 내리다'
'홍수가 나다'
'바람이 불다'
'그 집에 들이치다'.
이 때 가장 치명상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입니다.
화창한 날만 계속된다면 모래 위에 세운 집도 어연번듯해 보입니다.
문제는 그 날에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결국에는 그 집에 들이치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집을 모래 위에 세웠기 때문에 그 무너짐이 엄청난 것입니다.
27절만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말씀을 마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
반석 위에 믿음의 집을 짓은 그리스도인.
반석 위에 참된 교회의 터를 세우는 교회공동체.
사실 이들의 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시간에 비해, 노력의 비해, 물질의 비해, 하나같이 모두가 손해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리석다 손가락질을 당할 만큼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의 손해란 사실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믿는 구석이 하나 있습니다.
‘We shall overcome’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주 안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들이차면 들이찰수록 그 위기 앞에서 그 절망 앞에서 우리의 승리는 더욱 빛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주어진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오늘도 걸어가십시오.
계산하지 마십시오.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마십시오.
바람 조금 분다고 휘뚝휘뚝 비틀거리지 말고, 주님의 가르침 따라 그리고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면 묵묵히 그냥 해내십시오.
이것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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