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가복음 4:26-29 저절로 맺는 땅-하나님 나라

心貧者 2019. 1. 11. 14:06

저절로 맺는 땅-하나님 나라

마가복음 4:26-292014/7/6(맥추감사주일 오후설교)

4: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4: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7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일종의 초여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보리농사 밀농사가 흔하지 않은 때에 맥추감사절을 지킨다는 것이 좀 어색하지만 한 해의 절반을 감사의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감사 절기는 지난 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함께 해주실 하나님의 은혜에 미리 감사하는 데 그 의미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맥추감사절, 감사 수업이지요.

 

재미난 이야기하나 할까요?

맥주를 무지 좋아하는 어느 분이 교회를 처음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간 이 분이 맥추감사주일이라는 현수막을 보고 혼자 미소를 짓더니 그 자리에서 등록카드를 작성하더니 교회에 자신 있게 등록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맥추라는 글을 그분은 맥주로 본 것이지요.

배경 그림도 맥주의 이미지인 보리이니까 의심 없이 맥주감사주일로 본 것입니다.

교회가 맥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를 다 지키는구나 싶어서 그래서 그 자리에서 등록했다고 합니다. 예배 후에 특식으로 치맥(치킨과 맥주)을 주는 줄 알고 바로 등록했다고 합니다. (치맥 / 무알콜 맥주)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한 대로 보고, 듣고,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비유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종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저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 바로 여기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비유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상당히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ㅅㅊㅈ교회 ㅇㅁㅎ씨의 해석을 경계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2더하기 35, 이런 도식적 해석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치고는 그 내용이 아주 평범하고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예수님의 관심은 어떤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뿌린 씨가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나고 다 자라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그 어떤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의 비유는 어떤 사람, 어떤 농부 보다는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땅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주인공이 농부가 아니라 땅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농사의 주체는 농부입니다.

땅도 중요하지만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농부입니다.

아무리 땅이 좋아도 경작하는 농부가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비유는 농사의 주체를 농부가 아니라 땅이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땅을 강조하는 이 비유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을 것일까요?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습니까?

농사의 경험이 있다면 이 비유의 핵심어인 28스스로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농사도 스스로’, ‘저절로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손, 사람의 손이 이만저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한 해 동안 정성껏 퇴비를 만들어야지요.

준비한 퇴비를 뿌려 밭을 기름지게 만들어야지요.

밭을 곱게 갈아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야지요.

씨 뿌리고, 물주고, 벌레 잡아주고, 풀 뽑아주고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농부보다는 이 비유에서 스스로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지금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어떤 면을 가르치려 하신 걸까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이 비유를 보니 여기에 사용한 단어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우선 씨 뿌리는 사람을 지칭한 어떤 사람이라는 단어로 헬라어 안트로포스anthropos’가 사용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냥 인간입니다. 농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소개합니다.

 

그 다음에 주목해야 할 단어는 자다일어나다입니다.

자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카테우데katheude’죽음을 뜻하는 말이고, ‘일어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에게이라타이egeiretai’라는 말은 부활즉 다시 사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단순하게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는 농사의 한 계절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농사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 땅에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농사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한 해의 농사처럼 땅에 씨를 뿌리는 일이라면 그 결과가 그 해에 조금 실망스럽다할지라도 내년을 기약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농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농사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좀처럼 세상이, 이 땅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세계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2000년이 지나고, 우리나라의 개신교 선교 역사가 130년 정도 지났으면, 이쯤 되면 어떤 열매가 맺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한 가지라고 맺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변화가 않습니다.

나아지기는커녕 더 망가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세상, 좀처럼 변화지 않는 교회.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근심, 낙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그 나라를 오게 하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 때가 도대체 언제쯤 이루어지는가? 입니다. 아무리 봐도 그 날이 묘연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기록한 당시 마가 신앙공동체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20절을 보시면 부활 후 승천을 앞 둔 주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 나옵니다.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지만 지금 그들 곁에는 주님이 아닌 사탄의 위협, 어둠의 권세, 제국 로마의 착취와 압제만이 가득합니다. 이 상황 속에서 초대 교회 성도 들이 묻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언제 임하는가? 입니다.

정말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는 하는 것인지?

주님의 약속이 혹 거짓은 아닌지?

이런 의심들로 가득한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2000년입니다.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만 해서 130년입니다.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어느 때나 어느 곳에나 복음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임재, 그리고 그의 따른 좋은 열매를 맛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뭔가에 더욱 짓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전에는 교회가 그래도 세상의 희망 창구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 희망마저 말하기가 참 어려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런 우리의 근심과 염려를 예수님이 부끄럽게 만듭니다.

우리가 뿌린 복음의 씨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 씨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담겨져 있다면, 때가 되면 기어코 싹이 트고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27-28절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4:27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4: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하나님이 땅을 통하여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이 땅에 세워진 교회 즉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싹이 돋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는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열매로 맺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저절로그렇게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끝없이 뭔가를 시도하고 성취해야 한다는 조급한 생각도 하지 말고, 당장 좋은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달하거나 낙심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조용히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바로 요한복음 154-5절의 상태에 거하는 것입니다.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허용하는 것뿐입니다.

바로 주어진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씨앗,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좋은 씨를 우리의 심령, 우리 마음 밭에 구석구석 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씨앗을 싹 틔우고, 자라게 하고, 결실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갔고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씨앗, 말씀의 씨앗을 과감하게 뿌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했던 말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절묘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7-10절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6:8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6:9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6: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6:9)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줄 모릅니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확신이었고 예수님의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그의 열매로서의 하나님의

더디더라도 반드시 오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 나라의 씨, 복음의 씨를 이 땅에 뿌려놓고 마냥 기다린다는 것은 쉬은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마다 혁명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천지개벽을 꿈꾸며 행동하는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복음의 씨만 뿌리는 오늘날 교회의 소극적 행동이 못마땅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때로는 교회가 행동하는 혁명가들에게 비난과 조롱의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에 매진해야합니다.

그 일이 소극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일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당시 열혈당원인 혁명가들과 선을 근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의 혁명 곧 하나님 나라는 총과 칼 군대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대비하신 하나님의 사랑 곧 그 긍휼하심의 은총으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그분의 자비 그분의 긍휼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허락한 멸시 천대 십자가를 지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역사와 현실은 퇴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의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다고 예수님은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제자인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멸시 천대 십자가 지고도 하나님나라를 대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