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로마서강해 3장 9-19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心貧者 2018. 12. 20. 10:45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로마서 39-19                                                                                                               2015/ 4/ 8()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타 종교인들이 하나 같이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끝까지 물고 넘어지는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만 구원이 있다고 고집하는가?

그리고 왜? 예수를 꼭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우기는가?

우리 인류의 스승 중에는 소크라테스도 있고, 공자님도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있고, 마호메트 예언자도 있는데 왜 꼭 예수여만 하는가? 입니다.

 

각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영적 우물을 깊이 파 내려가다 보면, 결국 그 근원은 하나인 것을 왜 그리스도교만 구원이 있다고 고집하는가?

또 산을 오를 때,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거늘 왜 예수라는 한 길만 고집하는가?

이곳으로 오르든 저곳으로 오르든 궁극적으로 한 정상에 오를 것을 왜 타종교를 배척하는가?

이것이 소위 포스트모던이즘이라고 하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 이분들의 주장이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어떤 종교인이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가르침이거나 선한 양심에 따라 서로 아끼고 서로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고 또 남을 나보다 너 낫게 여기는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세상이 오겠지요.

 

그런데 정말 그런 세상이 오는가? 라고 할 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에 대한 가르침도 있고 깨달음도 있고 열정도 있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 헌신도 있는데 왜 이 땅은 더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까?

인류의 좋은 스승도 있고 또 그 가르침에 인생의 전부를 헌신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 가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그렇습니까?

 

바울의 설명입니다.

오늘 본문 시작되는 9절입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다 죄 아래에 있다입니다.

죄 아래 있는 존재

그래서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인류의 스승들이 베푼 가르침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그 안에 죄가 지배하고 있는 한 거기에는 변화라는 구원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다 죄 아래에 있다

이 의미를 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피조 된 모든 세계는 다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는 누구도 예외 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인류의 스승이라고 여기는 분들도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 심판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죄의 열매()인 죽음으로 이미 이것이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는 먼저 율법을 받고 할례의 증표가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바울은 힘주어 말합니다. 유대인인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

왜 이것이 문제일까?

그것은 하나님 법대로 그리고 자기 양심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자기 양심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있지만 그 법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 상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물론 이 주장에 대해서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이 주장에 대해서 아주 못 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살펴 본 것처럼 가상의 유대인 적대자와 바울이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유대인을 행한 바울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도대체 유대인의 나음이 어디에 있는가? 입니다.

31절입니다.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39절에서 말합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유대인의 나음이 있다, 없다?

없다는 것입니다.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설명합니다.

유대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율법이 있고, 이방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양심의 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도, 율법을 가진 유대인이나 또 율법 대신 양심을 가진 이방인이나 그 법대로 그 양심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연약함 육신의 나약함 앞에서 하나님의 법도 양심에 법도 번번이 무너지고 말 수 밖에 없는 것인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 대학병원 중환자 집중치료실.

남편을 살리고자 하는 어느 한 아내의 탄식.

아이고 저 인간, 살아서도 사람 속을 들들 볶더니 누워서도 속을 섞이는 구나, 이 많은 병원비를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아무리 남편이 원수 같다 할지라도 그 남편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왜 없겠습니다. 돈 보다 중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목숨보다 먼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은 병원비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연약함 육신의 나약함 그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법도 양심에 법도 생명의 법도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우리나라 스님 중에 성철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정말 인물 중에 인물입니다.

한국불교에 이런 큰 스님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자랑이지요.

언제 이분이 출가하게 되는가 하면 결혼 후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합니다.

석가모니부처가 결혼 후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 한 것처럼 성철 스님도 결혼 후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합니다.

출발부터가 범상치 않지요.

 

얼마나 이분이 수행을 철저하게 했던지 부모가 오고 처자식이 와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행정진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십년동안 사람들이 들오지 못하게 철조망을 처 놓고 살았던 분이 이 분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도 철조망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십 육년 동안 이 어른이 생식을 하면서 살았는데 솔잎가루와 쌀가루만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옷은 말할 것도 없지요.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지요.

 

더 놀라운 것은 이분이 팔년 동안 장좌불와로 지냈다고 합니다.

8년 동안 눕지 않고 꼿꼿이 앉아서 자는 장좌불와의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열반송을 남기셨는데, 그 내용이 기막힙니다. 원래 본문은 한문이지만 한글로 풀어서 소개합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렸구나

 

여러분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것을 성철 스님이 깨달고 자신의 마지막 삶을 자신의 열반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얼마나 솔직합니까?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수미산이라는 것은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거대한 산으로 삼라만상 우주를 지탱하는 산입니다. 그런데 그 산보다 자신의 죄가 더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무게는 무거운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시편에 있는 말씀을 대거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단업니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이 있으니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이나 우리에게는 양심의 법이 있으니 그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이방인이나 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 모두가 다 죄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정말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그리스도교만 구원이 있다고 고집하는가?

?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그 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죄 아래서 벗어날 길이 없는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박하면서 물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무엇인가?

바로 죄와 죄의 열매인 사망을 이긴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이것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타종교 특히 불교의 경우 예수님의 출생을 인정하고 심지어 축하까지 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는 있지만 주님의 부활은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가르침이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얼마 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창립자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미국 현지 시간으로 42일에 향년 88세로 작고하셨습니다.

19772,600(300) 달러를 들여 1만 개의 유리로 뒤덮인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분이 요즘 유행하는 '긍정의 힘'을 교회에서 설교한 원조입니다.

그의 지론은 한 가지입니다.

"꿈꾸면 못할 일이 없다

이 슬로건을 내세워 수정교회를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교회 중하나로 성장시켰습니다.

 

이 분이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노천극장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오직 한 가지의 목회철학만으로 수정교회를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신앙 생활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동안 사람들을 보고 한 번도 죄인이라는 말을 언급하거나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도 목회하는 동안 죄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지친 영혼들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전달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꿈꾸면 못할 일이 없다

이 긍정의 힘, 이것이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 설교의 핵심이고 목회철학입니다. 여기에 가장 영향을 받은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인기를 얻는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향해서 너는 죄이야, 그러니 회개 해이렇게 정죄 한 적은 없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인데 마태복음 913절입니다.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 아래 있는 우리가 왜 예수 앞에 나와야 하는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어야하는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거짓되게 하는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어 구원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대속하신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구원의 길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진리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이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생명을 간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영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육신을 입은 인간 곧 죄인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죄 아래 있지 말고, 길이요 진리로 생명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역사에 참예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