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
누가복음 19:41-48절 2015/ 3/27(금)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19: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우리나라 4대명산 중에 하나가 공주에 있는 계룡산입니다.
가 보셨습니까?
계룡상의 정상이 ‘천황봉’인데, 그 높이가 845미터입니다.
이 계룡산의 정상보다 5미터 더 높은 해발 850미터 산 위에 세워진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좀 나겠지만 쉬지 않고 3-4시간을 꼬박 올라가야하는 높이입니다. 그만큼 높은 산 위의 세워진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살았을까요?
여기에는 슬픈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잦은 외침 때문입니다.
(이집트, 블레셋, 미디안, 앗시리아, 바벨론, 로마 등)
지금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화약고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국을 처음 세우고 삼은 수도가 기브아(높은 언덕)입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왕권을 인수 한 후 임시 수도로 삼은 곳이 헤브론입니다.
그리고 7년 반 만에 수도를 새롭게 옮긴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이곳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천의 요새로 삼을 만큼 높은 산에 위치한 도시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 분쟁의 땅에서 어떻게든지 살아남고자 하는 생존 전략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그 자체가 자랑이었습니다.
비록 생존 전략 때문에 세운 도시이지만 다윗 왕이 세운 그 도시를 여호와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의 또 다른 이름이 ‘시온’입니다.
그 뜻은 ‘요새’, ‘철옹성’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요새, 하나님이 지키시는 철옹성으로 여길 만큼 최고의 성으로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즉 지구의 중심, 지구의 배꼽 ‘옴파로스’가 예루살렘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예언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받은 환상적인 예언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이 되는 나무가 설 자리로 예루살렘이 등장합니다.
다니엘서 4장 10-12절입니다.
4: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4: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4: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이처럼 하늘까지 닿는 나무, 우주의 중심이 되는 나무, 이 나무가 서 있는 땅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그 자랑스러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리 주님이 ‘우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자랑이요, 자존심인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비통함의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셨다’라고 하는 헬라어 ‘엑크라우센’은 비통함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소리 내어 우는 통곡을 말합니다.
벅찬 감동과 벅찬 희열 때문에 눈물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통곡의 눈물, 슬픔의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땅인 동시에 자랑이요, 자존감입니다.
그 거대한 성, 그 거대한 요새를 본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요 가문의 영광이요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요새 시온, 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우리 주님이 보시자마자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이 건축한 물리적인 건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리적인 건물인 예루살렘을 마치 인격을 가진 존재인양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것은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건물이 아니라 자기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루살렘이란 ‘예루’라는 말과 ‘살렘’이라는 말이 합해진 복합어 입니다. ‘예루’라는 말은 ‘도시’, ‘성읍’이라는 듯이고 ‘살렘’의 뜻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합하면 ‘평화의 도시’ ‘평화의 성’ 이것이 예루살렘입니다.
문제는 그 뜻과 달리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백성 속에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화평이 임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름만 예루살렘이지 그 백성의 삶 속에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장차 자신을 배척할 예루살렘 성 사람들을 보시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2절입니다.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우리 눈에 숨겨진 참된 평화를 너희가 찾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의 의해 주어진 인위적이고 한시적인 거짓 평화가 아니라 참된 평화 영원한 평화 하늘의 평화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헤롯이 가져다 준 평화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의 평화로 오신 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새 예루살렘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을 평화 도시가 아닌,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유명한 성전정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세상의 정치 권력자와 그리고 그 권력에 붙어 살아가는 종교지도자들이 표방하는 거짓 평화를 깨부순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 주님이 죽임을 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소문이 온 땅에 퍼지자 예루살렘 성이 발칵 뒤집힙니다.
너도 나도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의심 반 믿음 반이었던 백성들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메시아로 전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수가 날마다 더해가는 데 거대한 민란이 일어날 정도로 그 세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유대인의 권력자요 기득권자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에 하나 거대한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군이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쌓아오고 누려왔던 기득권에 대한 보장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을 막을 만한 뚜렷한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예수를 동조하지 않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급하게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가 비장의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 49-50절입니다.
11: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스라엘 온 백성을 위해서 한 사람 예수를 죽이자’는 것입니다.
왜냐?
저 이방의 갈릴리 사람 예수 때문에 거대한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가 즉시 개입할 것이고 그러면 지금의 평화는 깨질 것이고, 예루살렘은 피바다를 피할 수 없으니 한 사람 예수 때문에 온 예루살렘이 쑥대밭이 되느니 차라리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한 사람 예수를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한 사람 곧 예수를 죽이자.’
이것이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책임졌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결론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의 평화를 지켜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추구 하는 평화의 논리입니다.
그러니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을 보고 우리 주님이 비통의 눈물 통곡의 눈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요새를 시정잡배나 드나드는 시장 통,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고 거짓 평화를 평화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그들을 볼 때 너무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통곡하고 비통해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 일입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통곡의 벽에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총을 든 군인의 살기어린 눈입니다. 과연 그들이 구하는 평화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평화일까? 아니면 사람의 평화일까?
하늘의 평화일까? 총 곧 힘의 평화일까?
분명한 것은 아직도 그들은 다윗과 같이 힘 센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그리스도 곧 평화의 왕을 버린 사람들, 과연 그들의 최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43-44절입니다.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무너짐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통곡의 벽이라는 역사의 현장 속에서 목격한 것처럼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무너짐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가짜 평화, 가짜 예루살렘은 반듯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의 왕 예수님을 버린 이스라엘의 대가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주님의 자녀이면서도 처절한 무너짐을 경험합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힘의 평화, 돈의 평화, 권력의 평화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 평화를 참 평화로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위협받거나 사라지면 넘어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이 말을 좀 더 강조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평화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무너질 수 없는 평화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평화를 거스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고, 이웃과의 평화를 깨고, 세상과의 평화를 깨고, 자연과의 평화를 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것처럼 우리를 보시고 주님이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바울의 권면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평화의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이 평화를 만민에게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이 땅에서 승리하십시오.
이런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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