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신 주 성령
로마서 8:26-30 2018/07/15 성령감림 후8주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6월 첫째 주일이 삼위일체주일이었습니다.
그 때 살펴본 본문이 로마서 8절 26절과 27절의 말씀이이어이어니다.
성령이 무엇인지, 왜 우리에게 오셨는지, 그리고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복습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이란 무엇인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제가 소개하고 싶은 본문은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요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또 우리 속에 계시는 진리의 영,
즉 거짓이 없는 참 하나님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짓이 없는 참 하나님이 바로 성령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마누엘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우리 육체 안에 말씀으로 거하셔서(요한복음7:38 ‘그 배에서‘) 임마누엘하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하나님처럼 형체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성령이라고 자청하는 이들, 예를 들자면 신ㅊ지 이ㅁ희나 ㅁㅁ중앙교회 이ㅈ록 같은 이들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 바로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결과들이지요.
좀 더 설명하면 성령이 거하는 우리를 통하여 생수의 강이 흘러나가는 열사를 말합니다.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둘째 그렇다면 왜 거짓 없는 하나님, 곧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셨을까?
그것은 자비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말을 빌린다면 선재적 은총, 선재적 사랑이지요.
앞서 읽은 말씀, 요한복음 14장 17절을 좀 더 확대해서 읽겠습니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4:18 (왜냐하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기 때문이다)리라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의 제일 속성은 사랑입니다.
긍휼과 자비이지요.
그런 하나님이 고아와 같은 우리를 내버려 둘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와와 같은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보혜사로 일하시는 성령입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천국을 예표 하는 에덴동산으로 이끄십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첫 사람, 그 사람의 독처하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한자: 보혜사)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늘 보좌 우편에 보내고, 홀로 남아 고아와 같은 우리에게 꼭 알맞은 짝, 곧 돕는 보혜사로 오신 분이 성령입니다.
세 번째,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가?
성령이 우리에게 보혜사로 오셔서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울은 구습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다시 죄와 벗하여 살아가려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호소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힘겨워 살아갈 용기조차 잃을 때, 느닷없이 닥쳐온 시련으로 인해 망연자실할 때, 성령은 이미 우리 속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로마서 7장 24절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이 깊은 절망과 신앙의 탄식 속에서도 성령은 이미 우리 속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이지요
창세기 4장 10절입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을 때, 그 때 하나님이 억울하게 죽은 이의 피를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 11절입니다.
광야로 쫓겨난 하갈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을 때, 그 때 하나님은 억울하게 당한 일을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 20절
소돔과 고모라에서 터져 나오는 울부짖는 소리를 있었을 때
그리고 출애굽기 2장 24절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는 소리가 있었을 때.
그 때마다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구원하신 여호와처럼 언제 어디서나 불의한 이들을 심판하시고, 연약한 이들은 돕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 바로 보혜사로 일하시는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우리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실까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우리인데, 그런 우리를 대신하여 성령이 어떻게 간구할 수 있을 까요?
그 이유가 8장 27절에 나옵니다.
8: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과 생각’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심장’과 ‘콩팥’을 가리깁니다.
옛 히브리사람들은 심장이 인간의 생각과 결단을 관장하고, 콩팥은 감정과 양심을 주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장기 하나하나를 살피시는 여호와처럼 성령도 우리와 마음과 생각을 하나하나 살피셔서 그 헤아림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간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인 자기 십자가를 지거나 험한 십자가의 길을 가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박해하는 사울에서 박해 받는 바울로 가려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은 이들의 고민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특히 진리의 영을 품고 참되게 그리고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민이 깊어가는 것입니다.
찬송가 458장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1절 두 번째 단락입니다.
‘아침 해 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가라’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Why me?'
'하필 왜 나입니까‘라고 탄식먼저 합니다.
결코 후렴의 가사처럼 참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가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잔인함 속에서 시편 기자가 탄식한 것처럼 ‘어찌하여’와 ’언제까지’와 마주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엎드려 하염없이 울 때 들려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그것이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두 번째입니다.
가난하게 하시거나 부하게 하시거나 건강하게 하시거나 병들게 하시거나 높이거나 낮추거나 앞서가게 하시거나 뒤처지게 하시거나 성공하게 하시거나 실패하게 하시거나 모든 일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그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두 번째 일입니다.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 보셨나요?
거기에 나오는 요리사처럼 그렇고 그런 뻔한 재료들, 그리고 철 지나고 묵혀 놓은 재료들 그리고 때로는 나쁜 재료를 까지 하나로 어울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성령도 우리 인생 안에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렇게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두 번째 일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님입니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8: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8:30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를 맏아들 곧 장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고 미리 정하신 선민이 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영화로 이끄시는 분이지요.
여기서 나온 그 유명한 신학적 용어가 justification (칭의) Sanctification(성화) Glorification(영화)입니다.
정리합니다.
성령이 보혜사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행하시는 일 세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를 위해 대신 간구하신다.
그러니 기도할 줄 모른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둘째,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시는 성령께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그러니 하나님을 먼저 신뢰하시고, 현실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새롭게 빚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를 justification 의의 길로 Sanctification 성화의 길로 그리고 Glorification 영화의의 길로 인도하는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십시오.
찬송가 186장 ‘영화로신 주 성령’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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