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사도행전 26:24-29 벌겋게 단 쇠

心貧者 2018. 7. 10. 10:45


벌겋게 단 쇠

사도행전 26:24-29 2018/07/08 성령강림 후 7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6: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6: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6: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믿음이라는 단어로 출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곧 예수를 그리스도, 나의 주, 나의 왕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의 친밀한 사귐이자,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3절에서 믿음을 설명할 때, 믿음의 역사(개역개정), 믿음의 행위() 믿음의 활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모든 행위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로 설명하자면, 참 포도나무가 되시는 우리 주님, 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게 되는 아주 깊은 사귐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할 때, 믿음을 너무 추상화, 관념화하고 있습니다.

머리로 믿고, 마음속에 갇혀있지요.

물론 그것도 그리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은총의 도구로 주어진 믿음의 영역은 그 이상입니다.

 

전도 해 보셨나요?

전도 받아 보셨나요?

전도 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리고 예수 믿고 천국가세요.’ 입니다.

이 때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예수를 단지 실존하는 존재로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흔히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것처럼 교회 다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나의 왕이자 나의 주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존재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깊은 교제, 그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격 전부를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일치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사도 야고보가 주장한 것처럼 믿음의 증거들을 반드시 세상에 보여야 합니다.

믿음의 증거들,

그것을 전통적으로 교회는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Kerygma 말씀 선포이지요.

그리스도의 부활 즉 죽은 자의 부활을 알리는 선포입니다.

둘째, Didache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 곧 천국복음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전도, 선교이지요.

셋째, koinonia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기도와 찬양과 묵상을 포함한 모든 예배 행위이지요.

넷째, diakonia 섬김입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일 중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저는 ‘diakonia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 같이 만만한 주제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실천하기 어려운 주제가 저는 ‘diakonia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섬김을 믿음의 역사(행위, 활동) 여기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분들을 호구로 여기고 낮잡아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찬송가 중에 하나를 뽑으라면, 언제나 거론되는 것이 찬송가 436장입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그 중에서 3절 가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누리니 / 날마다 섬기며 주함께 살리라

 

이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화하게 하는 섬김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어서 최대의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찬송가 4363절처럼 산 인생이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그를 이방인의 사도’, ‘이방인의 친구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불렀고 또 우리도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처럼 바울이 역사 속에 처음 등장한 것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여겼을까요?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단서가 사도행전의 전편인 누가복음 7장에 나옵니다.

7: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전통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털 끗만치의 더러움 허락되지 않는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당대의 가장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한 마디로 뼈 속까지 유대인입니다.

 

그러니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그리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인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나사렛 사람 예수는 그저 유대교의 신앙과 유대교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가짜 그리스도 중에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의 신앙과 전통을 뒤흔드는 불온한 무리들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울은 도저히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뿐만 아니라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바울이 첩보 하나를 입수하게 됩니다.

죽은 자의 부활 즉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불온한 무리들이 다메섹에도 나타났다는 첩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대제사장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불온한 무리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지요.

 

그때입니다.

바로 그 때 바울 생애 있어서 결코 잊지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도까지 된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했던지 사도행전 9, 22장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6장에서 세 번씩이나 자신의 회심을 언급합니다.

 

이날 이후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데, 그 뒤바뀐 삶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날 이후 바울은 박해하던 사람에서 박해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박해 받는 인생.

그 온갖 쓰라림과 아픔을 무색하게 하는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진정한 능력자가 된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빌립보 감옥에서 불렀던 감사 찬송의 역사입니다.

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16: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도대체 이런 담력, 이런 능력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대속의 은총,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38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저희 동네에 소풍교회가 있습니다.

소망이 풍성한 교회인데, 줄여서 소풍교회라고 부릅니다.

그 교회의 2018년 표어가 이런 것입니다.

불편한 삶, 자유로운 영혼

이것이 그리스도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총, 그 십자가의 은총에 사로잡힌 이의 담력과 능력이겠지요.

그러니 히브리서 1138절의 말씀처럼 세상이 아무리 힘 있고 권세가 있다한들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오자마자 바울이 체포됩니다. 유대인의 모함과 고발로 로마 군인에 의해 체포를 당하게 됩니다.

이제 박해 받는 일이 일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코 주눅들지 않습니다.

낙심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고발한 유대인의 의회 앞에서 그리고 로마의 법정 앞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인 두 가지 증거 곧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하게 전하게 됩니다. 그만큼 바울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면서 총독 베스도가 새로 부임하게 됩니다.

총독 베스도가 볼 때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판결하기란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총독으로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함부로 재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꾀 하나를 냅니다.

가이사랴에 가서 정식 재판을 진행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이 마침내 가이사랴 법정에 서게 됩니다.

고소인들이 주장하는 바울의 죄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군중을 선동하여 유대인의 폭동을 유도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쉽게 설명하면 집시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이지요.

 

하지만 피고인 바울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총독 베스도와 그와 함께 온 유대인 아그립바 왕 앞에서 두 가지를 변호를 합니다.

첫째, ‘유대인의 고발은 거짓이다.’

둘째 이 부분이 중요한데, ‘내가 증거 한 복음 즉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이 선포(케리그마)는 거짓말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61-23절의 내용입니다.

 

그러자 새로 부인한 총독 베드로가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앞에 설명한 두 가지)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총독 베스도 앞에서 이렇게 자기변호를 합니다.

26:25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나는 지금 맑은 정신으로 참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미친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 유대인 아그립바 왕 앞에서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26: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 당신은 나와 같은 유대인으로 그동안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예수의 일들을 이미 다 알 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7절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이미 그 모든 일들이 예언자들이 전한 예언의 성취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26:27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도대체 이런 담력, 이런 지혜와 전도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러자 유대인 아그립바 왕이 강력히 부인합니다.

26:28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아주 옹색한 변명이지요.

그 때 바울이 유대인 아그립바 왕을 향해 결정타를 날립니다.

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아주 기가 막힌 일이지요.

누가 고발인이고 피고인이지

누가 자유인이고 죄수인지 알 수 없는 아주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소풍교회 표어처럼 바울은 이미 불편한 삶 자유로운 영혼의 상태가 된 것이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옥에 갇히고 고난에 처한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건 쓰라린 일입니다.

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 쓰라림과 아픔을 무색하게 하는 자유와 평안이 우리의 능력, 우리의 자부심이 된다면 말은 달라집니다.

예수로 인해 손해를 본다 해도 결단코 후회하지 않는 믿음의 크기가 있다면 말은 달라집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토르시의 본당신부의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그건 벌겋게 단 쇠일세. 그런데 그 진리를 가르치는 자네는 손으로 덥석 움켜쥐지 않고 화상을 입을까 봐 부젓가락으로 그걸 집으려 들 텐가?’

 

정말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벌겋게 단 쇠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화상 입는 한이 있더라도 덥석 손으로 움켜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벌겋게 단 쇠같은 이 별명,

화상을 입는 한이 있더라도 덥석 손으로 움켜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