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
사도행전 9:10-19 2018/02/25 사순절 2주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9: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누군가에게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는 것만큼 복되고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가 이끌어 주는 분들을 향해서 우리가 선생님 또는 스승이라고 높여 부르면서 깍듯이 살피고 모십니다.
선생님, 앞서가 이끌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승이란 가르쳐 이끌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서가 이끌어 주셔야할 선생님과 그리고 가르쳐 이끌어 주셔야 할 스승이 요즈음 참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학생과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글을 가르치고 문학을 가르치고 무엇보다도 인생을 가쳐야 할 늙은 스승은 차마 입에 오를 수 없는 민망한 짓들을 젊은 제자에게 지속적으로 하였고,
연극을 가르쳐야할 스승은 특별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추악한 짓을 하여 꿈 많은 젊은 배우의 미래를 송두리 채 짓밟았으며,
연기를 가르치고 노래를 가르쳐야할 선생님은 친밀감이라는 포장 속에서 어린 자녀들에게 공포감과 비굴함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우리 주님이 복음서에서 이런 말로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3장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랍비’라고 불리 움을 받기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23장 8절입니다.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이라는 그 이름에 합당한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선생이자 스승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3장 10절로 넘어갑니다.
마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우리의 유일한 지도자,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이지요.
사도 야고보는 좀 더 강하게 언급합니다.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천둥과 같은 말씀이지요.
특히, 항상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는 저에게 있어서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가르치라’는 야고보의 이 권면은 천둥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주님처럼 누군가의 길이 되는 참된 스승, 참된 선생이 될 수 있을까?
그 기준을 우리 주님이 요한복음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의 뜻을 늘 살피고, 그 뜻을 앞서서 몸소 행하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참된 스승이요 참된 선생님이요 참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늘 살피는 분입니다.
둘째, 그 높은 뜻을 앞서서 몸소 해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의 길을 거쳐야 합니다.
첫째, 십자가의 길을 거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과 철저한 자기희생의 길을 거친 분 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스승 참된 선생 참된 지도자 참된 목사를 찾기 어려운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
그리고 철저한 자기희생이라는 이 십자가의 과정 없이 가르치는 자리에 올라섰기 때문입니다.
둘째, 십자가의 길을 거쳤다면 그 다음에는 믿음의 길인 몸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몸의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진리 안에 있는 한 생명 안에 있는 한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의 확신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짓이 진리를 이길 수 없다는 확신이지요.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인간적인 모멸감이나 수모를 안겨 주어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는 분이 우리의 참 스승입니다.
저에게는 이 사진에 나오는 세 분이 저의 스승이자 선생님이자 지도자이지요.
맨 오른 쪽부터 시인 윤동주, 목사 문익환(1918), 그리고 이 사진에 없지만 그의 친구이자 동지인 사상가 장준하 선생님입니다.(이영헌 장로회신학대교수)한 분은 문학으로, 한 분은 성경으로, 그리고 또 한 분은 양심이 있는 행동과 사상으로 결코 이길 수 없는 빛이 우리를 감싸고 있고,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진리가 우리 안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말뿐만 아니라 몸으로 보여준 저의 스승들이지요.
이처럼 바울에게도 늘 마음속에 품고 살아갔던 스승이자 선생님이자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아나니아이지요.
바울에게 있어서 아나니아는 앞서가 이끌어 주셨던 선생님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아나니아는 그리스도의 도를 가르쳐 주었던 스승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이 되고 안내자가 되는 것만큼 복되고 귀한 일은 없을 것인데 그 몫을 아나니아가 감당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의 대상이 교회의 박해자로 유명했던 베냐민 사람이자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바리새인 사울이었다는 것이지요.
유대인 청년 사울, 절망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가 유대교에 대한 얼마나 남다른 신념과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인지는 그의 손에 쥐어진 대제사장의 공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입니다.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시점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러자 사울이 엉겁결에 묻습니다.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여기서 말하는 주란 신적인 대상 곧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으로 사울은 곧바로 예수님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러자 말씀의 주체이신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신비이지요.
예수님과 사울의 이 만남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스러운 만남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 9장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22장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26장에서 세 번 박복해서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교회, 특히 다메섹 교회가 그의 회심을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 아픔이 아직도 생생한데 누가 살기등등했던 사울을 그리스도의 형제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이지요.
그 때 그에게 길을 열어주신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아나니아입니다.
다메섹 즉 다마스쿠스에 형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던 아니니아입니다.
행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9: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지요.
다메섹 아나니아
그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때에 임했던 박해의 검이 지금 다마스쿠스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유대인 청년 사울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행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메섹 아나니아는 ‘직가’라는 거리로 향합니다.
‘직가’란 ‘곧은 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로 사태의 긴박성을 암시합니다.
앞 뒤 재지 말고 좌우 둘러보지 말고 빨리 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간 사울에게 다메섹 아나니아가 행한 것이 있었습니다.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여기에 보면 다메섹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행한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율법과 자기 의에 눈멀었던 사울의 눈을 뜨게 해서 그리스도의 도를 보게 한 것이지요.
여기서 다시 본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나블레포(anablepo)라고 하는데 ‘우러러 본다’는 뜻입니다.
낮잡아 보았던 나사렛 사람 예수를 드디어 아나블레포, 그리스도도 우러러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것이 사도행전의 특징인데 사울로 하여금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해서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을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방인 즉 헬라인의 사도가 된 사울은 헬라식 발음인 바울로 불러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교회사 속에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직가’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 한 다메섹 아나니아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하나니아Hanaiah
와 연결된 이름입니다.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메섹 아나니아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교회사 속에서도 그리 유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다메섹 아나니아를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순종이
그의 아름다운 헌신이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돌봄과 희생이 위대한 전도자이자 사도인 바울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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