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6:9-13절 주기도문 강해⑰

心貧者 2018. 3. 1. 12:09


주기도문 강해

마태복음 6:9-132018/2/28()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성경에 등장하는 첫 송영

다윗의 송영(역대상 29:10-11)

29: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29: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시편 각권 마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송영(5가지)

1(1-41)

4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2(42-72)

72: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3(73-89)

89: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4(90-106)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5(107-150)

150:1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50:2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150: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4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150:5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송영의 변천 역사와 그 기록된 뜻을 새겨보기 전에 살펴볼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613절에 기록된 송영부분이 괄호 안에 묶여 있다는 점입니다.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면서 우리 성경은 난해주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4)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신약성경의 역사를 이해해야합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약 성경 27권의 원본(저자가 쓴 1차 자료)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원본을 손으로 베껴 쓴 사본만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가가 처음 쓴 복음서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완성된 마가의 복음서를 누구나 옆에 두고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원본을 기초로 해서 베껴 쓰게 된 사본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본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쯤 들어보았던 사해 사본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성서학자들과 성서 고고학자들은 기대합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동이 1947년 사해 북서 해안에 있는 쿰란(Qumran)지역 동굴에서 우연히 사해사본을 발견한 것처럼 언젠가는 원본이 발견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사본들만 남아 있습니다.

 

사본들을 비교하다보면 첨가되었거나 그 반대로 삭제된 흔적을 가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손으로 베끼다 보니 나오는 실수일수도 있고, 다소 의도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필사 자가 의도적으로 문장이나 문맥을 손질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예수님의 뜻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필사 자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본들 사이에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고, 원본을 재현하고자 하는 본문비평학이라는 학문이 최근에 형성되고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비평학의 한 맥락인 평행본문비평

[마태복음 26:69-75]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누가복음 22:56-62]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요한복음 18:15-18,25-27]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그렇다고 해서 성경 본문에 대한 신뢰를 버릴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신약성경 본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이며 전체적으로 원본과 다름이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난외주(각주)에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만큼 성경은 신뢰할만하고 정직합니다.

 

송영이 괄호 안에 묶여 있고 난외주에 4)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본들을 비교해 본 결과 마태가 처음 복음서를 쓸 때 송영이 없었음 가능성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 누가복음처럼 송영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런데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송영이 삽입되었고, 이것을 좋게 여긴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그대로 이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교의 송영과 다른 그리스도교의 송영이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향한 송영 즉 찬송(칭송)하는 노래또는 영광을 돌리는 기도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유대교 송영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송영은 제사장이 회중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올리는 기도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일예배 때 기도자의 기도와 주기도를 마치면 울려 퍼지는 성가대의 응답송(주로 아멘송이나 영광송이 사용됨)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송영은 우리의 축도처럼 모든 예배(제사)의 순서를 마친 후 드린 제사장의 응답 기도였던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달리 미국과 유럽의 여러 교회에서 주기도를 올릴 때 송영부분인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이 원래 주신 기도문에는 그것이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하는 일로 보기는 힘듭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인정받는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에서 송영을 말씀하지 않았지만, 송영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셨음에 분명하다.’

 

개인의 기도든 회중의 공동(대표) 기도든 송영으로써 기도를 마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자 적절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드리는 송영 속에 찬송(칭송)으로 드리는 영광의 노래영광을 돌리는 아멘의 기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드리는 송영하나님이 전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의 정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송영답게 주기도의 송영 속에는 아주 묵직한 단어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나라 ‘ἡ βασιλεία(헤 바실레이아)’ ‘the kingdom’

권세(권능) ‘ἡ δύναμις(헤 디나미스)’ ‘the power’

영광 δόξα(헤 독사) the glory

 

첫째, 나라에 대한 찬양과 기도입니다.

이 송영이 초기그리스도인에 의해 고백될 당시 로마제국은 지상에 존재하는 나라 중에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소위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정신이지요.

로마 황제의 다스림 아래 들어와야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제국주의입니다. 다시 말해 나라가 오직 로마 황제에게 있습니다.’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나라가 영원히 아버지에게 있습니다.’는 그리스도인의 찬양과 기도는 목숨을 걸어야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은 곧 로마의 황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찬양과 기도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줍니다.

 

하나는 왕의 왕은 오직 하나님 뿐 이라는 신앙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상의 왕이나 지상의 지도자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왕들 위에 진정한 왕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또 하나는 나라 중에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유일하고 영원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 역시 지상의 나라와 정부를 부인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 가운데 진정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이 성서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할 때 마지 막에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Please help me, God(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미국 공군 역시 전통적으로 신병 입대선서에서 이런 고백을 해왔습니다.

‘so help me, God(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이처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종적인 충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 권세(권능)에 대한 찬양과 기도입니다.

권세의 의미는 헬라어 δύναμις(디나미스)에서 나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설명에 따르면 한층 더 높은 형상(形相)을 실현(實現)할 수 있는 소질이나 능력을 뜻하는데 영어의 ‘dynamic(다이내믹)’‘dynamite(다이너마이트)’가 여기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은 δύναμις(디나미스)권세로 번역해 놓았는데 이는 헬라어 엑수시아에 더 가깝습니다. 그 뜻은 보이지 않는 힘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시대를 지배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로마 황제에게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합니다.

로마 황제에게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권세()는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만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영광에 대한 찬양과 기도입니다.

영광을 한자로 표기하면 榮光이 됩니다. 빛나고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독사는 히브리어 카봇을 번역한 말인데 카봇은 전쟁할 때 입고 나가는 전투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던 카봇의 뜻이 시간이 흐르면서 무거운 것또는 중요한 것이라는 뜻으로 확대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빛남’ ‘높음’ ‘중함등의 의미로 발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존귀함을 받는다, 높임을 받는다, 찬양을 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이 어디에 있다고 가르칩니까?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아버지께 영원히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결국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송영은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는 고백이요 선언입니다.

이 말을 뒤 집으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이 세상 누구에게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뜻이 되며, 또한 나는 오직 하늘에 께신 우리 아버지께 충성하겠습니다.’라는 맹세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이 함께 모여 이 고백을 드릴 때마다 세상의 질서는 바로 잡히게 될 것이며, 이 세상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를 만민에게 공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