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강해⑬
마태복음 6:9-11절 2017/12/27(수)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①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②나라가 임하시오며 ③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①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오늘부터 주기도에 나타난 ‘우리들을 위한 기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We Petitions’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청원들’이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세 가지입니다.
6:11 ①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②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③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세 가지의 청원들로 나뉘어져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내어 드리기를 바라는 청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임재(통치)이지요.
에베소서 3장 17절에 나타난 바울의 표현을 빌린다면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는 것입니다.
①일용할 양식 곧 생명의 떡(양식)을 먹고
②죄로부터 벗어나고 죄의 형벌을 탕감 받으며
③늘 악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요?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이것이 복음서에서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통치)이고 바울 서신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이며 오늘날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구원론입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보았던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의 청원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우리의 청원들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첫 번째 기도(청원)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6:11 ①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우시오스’는 ‘오늘 먹을’ 이라는 뜻 으로 풀 수도 있고 ‘내일의’라는 뜻으로도 풀 수 있습니다.
어떤 뜻으로 보든, 여기서 구하는 양식은 두고두고 먹을 풍족한 양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양식을 뜻합니다.
최소한의 일자리를 뜻하는 ‘일용직’처럼 최소한의 양식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왜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라고 했을까? 입니다.
우리의 필요나 우리의 사정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모르실리도 없고 또 전부는 아니지만 일용할 양식만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 역시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 하셨을까요?
첫째, ‘양식의 주권’ 곧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양식입니다. 밥이지요.
생명의 기초가 되는 밥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날마다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언하고 고백하고 그분의 주권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 염려 없이 말입니다.
둘째, 오늘 ‘우리’의 배고픔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망가지는 것은 끝이 없는 인간의 탐심(욕)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기초가 되는 밥의 주권을 하나님에게 두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수고로움과 애씀 곧 자기 노고勞苦에 둡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두 부자가 좋은 예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첫 번째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12: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2: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2: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두 번째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16:14 바리새인들은 ①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②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③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중간 생략)
16:19 한 부자가 있어 ③자색 옷과 ②고운 베옷을 입고 ①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16: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16: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16: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16: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이것을 기억하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누가복음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또 하나는 누가복음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따라서 주기도의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나’의 배고픔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배고픔을 기억해야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처럼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우리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살펴야합니다.
불편하면서 안타까운 이야기 하나드리겠습니다.
현재 인류의 생명을 가장 많이 앗아가는 것은 에이즈와 같은 질병이 아닙니다. 사고도 아니고 테러도 아니고 전쟁도 아닙니다.
바로 가난과 기아입니다.
굶주려 죽는 것이지요.
21세기의 거지 나사로들이 굶주려 죽는 것입니다.
유엔세계식량기구에 따르면 세계인구 일곱 명 중 한 명은 오늘 저녁을 굶은 채 잠자리에 든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나와 상관이 없는 ‘타인’이 아니라 ‘우리’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때 마다 ‘나’의 배고픔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배고픔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배고픔을 어떻게 기억해야할까요?
두 가지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째, 자기 절제와 검소입니다.
배고픔은 나라님도 해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도 돌로 빵을 만드는 것으로 배고픔을 해결하지 않으셨습니다.
핵심은 ‘배고픔’이 항상 우리의 몫(책임)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26: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26: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인간의 해결 책) 하거늘
26: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하나님의 해결책)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배고픔’이 항상 우리의 몫(책임)이라는 이 비밀을 모르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배고픔’을 항상 우리의 몫(책임)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 절제와 검소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의 부자와 16장의 부자의 행실이 왜 문제가 되는 지 아시겠는지요?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 어디에도 배고픔’을 항상 우리의 몫(책임)으로 여기는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오늘 ‘우리’의 배고픔을 어떻게 기억해야할까?
바로 나눔 sharing 입니다.
옛말처럼 콩 한쪽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26:11 가난한 자들이 (임마누엘처럼)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이유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단번에 집이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이 방법을 거부하셨습니다.(마4:3-4)
콩 한쪽도 나누는 나눔 sharing을 통해 ‘양식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과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날마다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나 산상설교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라는 불가능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행하라는 새로운 명령(율법)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이자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외의 또 다른 양식이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그 양식이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온 산 떡(생명의 양식).
바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것입니다. 영접이지요.
요한복음 6장입니다.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니 다시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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