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고린도전서16:15-18절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영성

心貧者 2017. 12. 19. 11:45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영성

고린도전서16:15-18
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16:16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16: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은 고린도 전서의 끝부분입니다.
모든 바울의 편지가 그렇듯 오늘 본문에서도 자신의 기억 즉 자신의 관심 속에 있는 여러 동역 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는 것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 짓습니다.

이것이 바울 서신의 특징이지요.

 

이중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할 분이 있습니다.

15절에 등장하는 스데바나라는 인물입니다.
스데바나

이 이름은 고린도 전서에서만 3번 등장합니다.

고전1:16

1: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아내 자녀 친척 노비 등 모든 집안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유일하게 세례를 베푼 가정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 바울과 스데바나, 스데바나와 바울서로 각별할 수밖에 없지요.

 

오늘 읽은 본문 고전 16:15절에서 등장합니다.

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아가야 지방 (로마가 통치한 그리스 남부지역으로 아테나와 고린도를 가리킴)의 첫 열매로 소개됩니다.

앞서 116절에서 설명 드렸던 내용의 반복이지요.

고린도 교회에서 얻은 첫 번째 세례교인이라는 뜻입니다.


고전16:17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마치고 소아시아의 주도인 에베소에 머물러 있었을 때 그 때 고린도 교회가 분쟁이 휩싸이게 됩니다.

그 때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안고 에베소에 찾아 온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16: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만큼 사도 바울과 친밀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신뢰했던 인물이 스데바나였습니다.

스데바나

여러분들이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울과 실라(실루아노)’, ‘바울과 디모데’, 그리고 바울과 디도

이 세 사람의 제자 뿐 만 아니라 동역 자였던 여러 인물 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스데바나를 꼭 기억해 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다 고린도 교회와 연결된 이름들입니다.

 

스데바나

본명은 아닙니다.

헬라식 세례명이지요.

당시 교회의 관례에 따라 붙여진 세례명이지요.

그 이름의 뜻은 면류관또는 왕관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동사로 번역하면 화환으로 장식하다가 되지요.

이처럼 스데바다가 고린도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면류관과 같은 그런 존재였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반증하고 있지요.

얼마나 귀합니까?

 

스데바나

면류관이라는 그 이름 하나 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겠지만 바울 사도는 스데바나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16: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이것을 새 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친 가정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몸을 바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배려와 섬김 그리고 희생과 자기 절제 곧 이타적인 마음이 몸에 배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입니다.

첫째는 자기에게 새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둘째는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교회 공동체인 성도들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도로서 기억하고 있는 아가야의 첫 열매 스데바나였습니다.

 

스데바나

참 매력적인 성도인데,

그는 섬김의 은사 외에 한 가지 은사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와 성도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은사입니다.

16:18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제가 오늘 여러분과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은사, 시원하게 하는 영성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첫째, 이런 사람을 알아주고 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둘째, 지금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교회의 분쟁을 이런 성품, 이런 인격, 이런 영성으로 풀어가라는 마지막 당부이자 권면으로 끝을 맺는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제가 사람을 바라볼 때 기준으로 삼는 것 3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좋은 성품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보통 인격이라고 하지요.

성품, 인격, 성격.

어느 것을 사용해도 다 좋습니다.

어찌되었든 선천적으로 형성된 인격이 좋은 분을 만나면 마음이 편하지요.

 

보통 좋은 성품은 후천적으로 다듬어지기 보다는 거의 선천적으로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2: 8입니다.

후천적인 것이 2 선천적인 것이 8 이지요.

훌륭한 가문이나 좋은 부모 만나면 자연스럽게 물러 받는 것이 좋은 성품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 만나며 관계가 그럭저럭 무난합니다.

 

둘째, 성품과 함께 꼭 지켜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성입니다.

지혜이지요.

자기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지혜이지요.

이런 분들 만나면 기분이 그냥 좋지요.

 

아무리 인격이 훌륭하고 성품이 좋다 할지라도 그 인격과 성품을 빛나게 하는 지성(지혜)이 따라 주지 않으면 그냥 착한 사람이지요.

그냥 법 없이 살아가는 시골 촌부입니다.

결코 자기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이로움을 주는 선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품과 함께 지성이 겸비되면 더 좋겠지요.

 

마지막 세 번째, 제가 꼭 살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간데없고 오롯이 이타적인 마음, 바로 영성입니다.

인품(성격)도 좋고 그리고 거기에다가 지성(지혜)도 겸비되면 참 좋겠지만 그 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타적인 마음, 영성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표현한다면 스데바나처럼 두 가지의 은사를 겸비한 사람이지요.

하나는 16:15 성도를 섬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16:18 사도와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타적인 마음, 곧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품아무리 좋아야 자기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자기 이름 값지키는 정도이지요.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그 이름 값을 건들면 그 좋았던 성품이 그냥 와르르 무너집니다.

 

지성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역시 자기 것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남에게 비난 받지 않으려는 자기 명예’ ‘자기 가문의 명예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인 영성은 다릅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지요.

자기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율법 중에 율법 황금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스데바나가 바로 그런 인물이지요.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영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소홀히 여깁니다.

세상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없으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이런 영성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도로부터 오히려 섬김과 대우를 받으러하지요. 뿐만 아니라 사도와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늘 묵은 체증으로 남아 있지요.

결국 이런 분들 교회의 걸림돌이 되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한 번 나 자신에게 냉정하게 물어 봅시다.

스데바나처럼 교회의 디딤돌인지?

아니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교회의 걸림돌인지?

이왕 신앙생활 하는 것 2018년도에는 두 가지의 영성을 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성도를 섬기는 섬김의 영성입니다.

또 사도와 성도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사랑의 영성입니다.

이 두 가지 영성으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