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누가복음 11:37-44절 위선을 꾸짖다

心貧者 2017. 12. 5. 12:31


위선을 꾸짖다

누가복음 11:37-442017/12/03 구주강림 1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11: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11: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11: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11: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11: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11: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보시면 아주 낯선 장면이 등장합니다.

율법 논쟁, 특히 안식일 법과 정결 법 논쟁으로 늘 예수님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바리새파.

그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식사 자리에 초대합니다.

 

흔치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메모광이자 수집광이었던 의사 누가는 이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복음서에 자세히 기록해 놓습니다.

11: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갈등장면이 도처에서 등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사람 예수를 이렇게 비난합니다.

경건치 못하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율법의 가장 기초가 되는 신앙 안식일 법과 정결 법을 어길 수 있는가? 이지요.

경건치 못한 사람

이것이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이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힐난은 바리새인의 위선이었습니다.

위선 떨지 말라는 것이지요.

오만하지 말고 건방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마태복음 23장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바리새인의 위선 목록이 아주 자세하게 그리고 아주 광범히 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길고 지루하지만 이왕 살펴보는 것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읽으실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위선의 모습들이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우리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시고 읽기를 부탁드립니다.

냉철한 자기 신앙 점검이지요.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위선)

23:4 또 무거운 짐(율법을 풀어헤진 미쉬나 우리성경은 장로의 유전이라고 함)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역시 위선)

 

여기에 보면 신앙의 위선, 그 특징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말만 하고(가르치기 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위선이구요

또 하나는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위선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5절입니다.

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이 아닌 누구에게?)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23: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13절로 넘어옵니다.

여기에 보면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목록이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4 (없음)

 

하지만 어떤 사본에는 막12:40, 20:47절과 유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소개합니다.

12: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역시 비슷한 내용인데

20: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바리새인의 위선목록입니다.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23: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3: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3: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3: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작은 계명)는 걸러 내고 낙타(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큰 계명)는 삼키는도다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3: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마지막으로 33절 이후부터는 외식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스가랴 선지자를 가리키며 구약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구전되는 이야기임)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23: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어떻습니까?

두렵지요?

두려우셔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남 사람의 첫 반응이 경외입니다.

두려움이지요.

 

중요한 것은 ’ ‘두려움이 곧 은총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라는 은총의 도구이지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처럼 말입니다.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외식하는 자의 기도는 어떻습니다.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남을 낮잡아 보는 오만에 빠지지요.

뿐만 아니라 자기 자랑, 자기 공과에 빠지기도 합니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어떻습니까?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둘 중에서 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겠습니까?

 

다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으로 돌아옵니다.

왜 바리새인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는지?

사실 그 이유를 밝히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어진 본문만으로는 판단이 어렵습니다.

다만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사사건건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동료들로부터 올 비난을 감수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사실은 조금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관계가 바로 깨집니다.

11: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지켜야 할 정결 법을 예수님이 보란 듯이 어긴 것이지요.

이 분위기를 좀 쉽게 설명 드리면,

심방 온 목사가 축복기도(식사기도)도 하지 않고 밥숟가락을 먼저 드는 상황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들어 온 순간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마음이 곧 불편했습니다.

정결 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바리새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편하지요.

 

만약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결 법에 따라 손을 씻고 식탁에 앉으셨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위생상으로도 그게 좋지요.

그런데 의도적으로 그러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음으로 바리새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서로의 주장이 있고 입장차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바리새인의 이러한 행동을 예수님이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초대한 사람의 체면을 세워주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위선을 꾸짖습니다.

그것도 아주 신랄하게 꾸짖습니다.

계속해서 13절부터 보겠습니다.

역시 이 본문을 읽을 때도 바리새인 자리에 꼭 나를 대입하시 바랍니다.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11: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십일조 제외 품목)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11: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11: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습니까?

위선을 향한 꾸짖음

이것이 과연 바리새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우리의 속은 늘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지요.

이 뿐 만이 아닙니다.

십일조와 함께 드려야할 공의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버렸지요.

더 무서운 것은 남들로부터 높게 인정받으려는 우리의 교만함입니다.

이것이 좀처럼 우리 안에서 죽지 않습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받고, 자기 자리에 걸 맞는 합당한 대접을 받으려는 욕망이 욕망이 좀처럼 죽지 않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불통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워지게 됩니다.

자기 의, 자기 자리에 사로잡힌 고집불통 장벽이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초대받은 사람이 초대해준 사람에게 덕담을 건네거나 복을 비는 것이 올바른 예의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적당히 사람의 귀를 간지럽힐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처럼 위선으로 가득한 바리새인에게 죽비와 같은 말씀을 날리셨지요.

 

왜 이렇게 거친 말씀을 하셨을까?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다시 돌이켜 하나님에게로입니다.

참된 회개의 길, 신앙의 양심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죄와 사망 그리고 사단에게 이끌려가는 그들의 위선.

그 위선을 꾸짖지 않고서는 그들을 깨우고 다시 일으켜 살린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위선을 꾸짖는 죽비와 같은 말씀을 날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설교자의 사명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죽비와 같은 말씀을 날리는 예언자적 설교자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신앙의 양심을 촉구하는 예언자적 설교자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교자를 그리고 이런 설교를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넋두리하지요.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는데 예레미야 208-9절입니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왜 항복할까요?

그 길만이, 회개만이, 돌이키는 것만이, 거듭나는 것만이, 신앙의 양심을 회복하는 것만이 우리 모두가 살 유일한 생명의 길이자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부흥할 수 있는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