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누가복음 17:7-10 따름의 보상을 넘어 소명의 기쁨으로

心貧者 2017. 7. 4. 17:48


따름의 보상을 넘어 소명의 기쁨으로

누가복음 17:7-102017/07/02(성령강림 후 3)
17: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17: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로 1년의 절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1년의 절반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때 믿음 소망 사랑중에서 하나를 붙든다면 우리가 무엇을 붙들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소망입니다.

내일을 바라보고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 바로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맘때가 되면 놓지 않고 부르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찬송가 338장입니다.

1.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 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 내 고생 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3.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4.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 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아멘

 

어쩌면 헛헛한 제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찬송을 부르게 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일을 향한 소망의 은총이 더 크기에 저는 이 찬양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이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찬송가 338장이 자꾸 흥얼거리게 됩니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성인들의 축일을 정할 때 태어난 날이 아니라 죽은 날을 기준으로 정합니다.

왜 그럴까요?

죽음.

곧 육체의 죽음은 세상에서의 생을 마치는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상으로의 옮겨감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本鄕天國入城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지난 629일은 베드로와 바울의 축일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정확히 629일에 순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전통은 오랫동안 이 날을 두 성인의 축일로 지켜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두 인물의 축일이 같다는 사실이 묘한 울림을 줍니다.

 

베드로와 바울

여러모로 다른 점이 참 많습니다.

우선 사역의 방향이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첫 번째 사도회의에서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의 역할을 나누게 되었는데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책임은 베드로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임은 바울이 맡게 됩니다.

 

또 다른 점이 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지낸 측근 제자인데 비해 바울은 생전의 예수님과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제자입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출신이라면 바울은 국제도시인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철저한 랍비 교육을 받았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노동자라면 바울은 엘리트 지식인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이 같았습니다.

둘 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순교로서 생을 마쳤다는 것이지요.

베드로.

베드로의 순교를 그린 그림을 보면 한결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이지요.

전설에 의하면 차마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을 수 없어 자기를 그렇게 처형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반면 바울은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로마 외곽에 있는 바울 기념교회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의 목이 몸에서 분리되는 순간 목이 세 번 튀어 올랐고 목이 닿았던 곳마다 샘이 솟았다고 하는데 그곳을 가리켜 사람들은 트레 폰타네(Tre Fontane)’라고 부릅니다.

트레 폰타네’ ‘세 개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바울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순교로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품고 있었던 하늘의 소망, 부활의 소망, 새 생명의 소망 때문입니다.

우선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입니다.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1:4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6절입니다.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4: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4:13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4: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4:15 여러분 가운데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4:16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반면 바울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8:36 성경(44:22)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8: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8: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8: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따름의 보상을 넘어 소명의 기쁨으로나아가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벧전4:13,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쁨이다.’

벧전4:14,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이 복이다.’

그리고 8:36,39,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의 증거다고 했는데 여기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여기에 보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 제자의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첫째, 어느 누구에게나 걸림돌이 되지 않은 삶입니다.

171-2절입니다.

17: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17: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둘째, 권면과 용서가 몸에 밴 삶입니다.

17: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7: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마지막 세 번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제자

주님의 참된 제자는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한 따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한 종이 있었습니다.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종이지요.

주인의 밭을 갈고 주인의 양을 치는 종입니다.

 

그런데 종이 주인이 맡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주인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생했지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해야 할까요?

아니면 빨리 먹을 것을 준비하고 밥 먹을 동안 시중들라고할까요?

후자입니다.

17: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17: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어떻습니까?

아무리 비유이고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하시지만 좀 너무한 감이 있지요.

하지만 이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마지막 절인 1710절에 있습니다.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익을 구하지 않는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요점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어떠한 이익이나 세상의 보상을 바랄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가나 바라는 세상의 종, 품삯이나 바라는 세상의 노동자로 주님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도 출신의 위대한 전도자 선다 싱(Sundar Singh)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님을 예배한다면, 차라리 그 속에 던져지기를. 내가 천국을 얻기 위한 욕망 때문에 주님을 섬긴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내쫓으시기를. 그러나 오직 주님을 사랑하기에 예배한다면, 주님은 내게 당신을 보여주실 것이고, 내 가슴은 그분의 사랑과 임재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선다 싱(Sundar Singh)은 말합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 천국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을 예배하는 믿음만이 진실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순례자의 삶을 넘어 순교자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따름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시대를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 하나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형입니다.

아들 그것도 맏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가를 바라는 종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형의 모습입니다.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의 맏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종, 종의 정체성을 가진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러니 제발 탕자의 형처럼 보상이나 바라고 대가나 바라는 종이 아니라 벧전4:13,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쁨, 벧전4:14,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는 복, 그리고 8:36,39,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는 사랑의 증거를 가진 그리스도의 참된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