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나단
사무엘하12:1-12절 2016/12/11(주일오후)
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12:2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12:3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12: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12:5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12: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12: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12: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역사적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퇴진을 거부한 대통령은 결국 국회로부터 탄핵 소추를 당하게 되었고 남은 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혼돈이자 국가적 위기입니다.
이 위기는 곧 경제의 위기 그리고 외교와 국방의 위기로 이어질 것입니다.
걱정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큰 걱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국민들이 ‘헬조선’이라는 분노와 ‘흙수저’라는 허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감 곧 희망의 상실입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이의 생각이나 다른 이의 아픔을 담을 만한 여백이나 여유를 빼앗겼다는 것이 더 큰 걱정입니다.
누가 이 어둠 속에서, 누가 이 고통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1장과 2장에서 그 해답을 조심스럽게 찾아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공동적으로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길다’라는 느낌입니다.
누가복음 1장, 유독 깁니다.
몇 절까지 나옵니까?
80절입니다.
40에 하나 더한 40절, 80절입니다.
이 숫자가 주는 의미도 남다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만큼 자세하게 기록해야할 그 무엇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유독 긴 누가복음 1장을 보면 두 가지의 노래 말이 나옵니다.
‘찬가’라고도 부르는 노래 말입니다.
46-5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가와 그리고 68-79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의 찬가입니다.
이 중에서 제가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68-79절에 나오는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의 찬가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자 그의 아버지 사가랴 제사장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런 노래 말을 붙입니다.
1:76 이 아이여(자신의 아들이자, 훗날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1: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1: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여기 보면 세례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로 감당해야할 몫(미션)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의 사명(미션)입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76절 후반부입니다.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 하는 일입니다.
앞서 가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예비자의 일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앞서 가서 준비해야 할 ‘그 길’이란 어떤 사역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77절, 회개의 길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곧 구원을 알게 하는 회개를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회개하라’ 입니다.
둘째, 79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1: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절망의 백성들에게 희망의 빛 구원의 빛을 비추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분이 곧 오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이것이 앞서 가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예비자의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정말 우리 에게 오신분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 그 분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2장 10절과 11절입니다.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리스도 주’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시고 주님이 되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나사렛 사람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요 우리의 주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누가복음 2장 12절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그 표적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가 우리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주가 되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소망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고 주가 되시는 예수님에게만 두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정말 답이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주가 되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이 기쁨의 소식을 먼저 들은 우리가 이 민족 위로하고 깨워야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몫, 이 세상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윗과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명(미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그리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전쟁이 가장 빈번하고 치열했을 때가 사울 왕과 다윗 왕이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인 만큼 전쟁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오죽 했으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칭송했겠습니까?
그만큼 전쟁이 일상이었던 시대가 사울 왕과 다윗 왕이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전쟁이 빈번했지만 다윗의 왕권이 점차 든든히 서가자 야전을 누리던 부하 장수들과 그리고 궁중의 신하들이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다윗에게 충언을 합니다.
‘야전 전투는 이젠 그만 참가하라’는 충언이었습니다.
이제는 왕이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신하들의 충언, 그른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항상 밀과 보리 추수를 앞든 봄에 있었습니다.
특히 블레셋과 암몬과의 전투는 피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운명이었습니다.
드디어 출전할 때가 되어 다윗은 요압을 군사령관으로 삼아 암몬진영에 보냅니다.
사무엘하 11장 1절입니다.
11: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여기에 보면 익숙하지 않은 장면 하나가 등장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입니다.
아마 본인도 익숙하지 않았던 낯선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모처럼 찾아온 느긋함과 나른한 평화를 어떻게 선용해야 할지 모를 때였습니다.
그런데요.
바로 그 때 문제가 생깁니다.
흥미로운 것은 죄의 유혹은 언제나 그럴 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느긋할 때, 시간을 어떻게 선용해야 할지 모를 때 죄의 유혹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선택한 것은 낮잠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는 결코 즐길 수 없는 낮잠을 즐긴 것입니다.
낮잠에서 일어나 다윗은 할 일 없이 궁궐의 옥상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죄의 유혹이 들어옵니다.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게 된 것입니다.
‘남의 몸을, 그것도 여인의 벗은 몸을 훔쳐본다.’
왕으로서 그리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그냥 멈추었다면 사실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양심의 문제이지, 죄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윗은 신하를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전령의 보고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11장 3절입니다.
11: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김 샛지요?
여기서 멈추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요.
11장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권력을 이용한 사실 상 겁탈이었습니다.
정말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하는 죄를 다윗이 범하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만을 위했던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만을 위했던 다윗이 드디어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의 맛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폭력을 넘어 살인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누구를 죽입니까?
심복이요, 예루살렘 출신의 용사인 우리아를 그것도 불명예스럽게 죽입니다.
그리고 우리아의 장례가 마치자마자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가 아내로 삼고 아들까지 낳습니다.
아주 나쁜 왕이요.
요즈음 말로 탄핵의 사유와 탄핵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사무엘하를 기록한 역사가의 평가입니다.
11:27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그 때 권력에 취한 다윗에게 하나님이 한 사람을 보냅니다.
오늘본문 12장 1절, 누구입니까?
나단 선지자입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가서 마치 한담을 늘어놓듯 이야기 하나를 풀어 놓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새 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2:1b"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12:2 그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12:3 그러나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양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고, 주인의 잔에 있는 것을 함께 마시고, 주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잤습니다. 이렇게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
12:4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양 떼나 소 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주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5절부터 읽는 데 역시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2:5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개하면서, 나단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12:6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단호하면서도 중엄하게 말합니다.
12장 7절부터 함께 읽겠습니다.
12: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긴 일.’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는 것을 한 일‘
그리고 '하나님을 무시한 일‘
그것은 죙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릅니다.
이것이 권력의 취한 다윗에게 목숨 걸고 던지 예언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읽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12: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12:12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교회, 사랑의 공동체이지요.
사랑을 먹고 그리고 사랑을 품고 자라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감싸 안을 땐 한 없이 감싸 안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병들었다면, 이 땅의 지도자가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착취와 폭력으로 바꾸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긴 일’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는 것을 한 일’
'하나님을 무시한 한‘
‘그것은 죄입니다.’라고 나단처럼 교회가 매섭게 꾸짖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지금 이 일을 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두 분 목사님이 청와대에 불려 들어가 대통령을 면담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선택한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어른으로 두 분 목사님이 대통령과 면담을 했습니다.
만약입니다.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나단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긴 죄’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한 죄’ 그리고 '하나님을 무시한 죄’에 대해서 과감하게 꾸짖었다면 어떠했을까?
분명한 것은 다윗이 나단의 말을 경청했기에 파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51편입니다.
표제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게 했던 나단 선지자의 그 매서운 꾸짖음.
그 예언자의 목소리가 우리 교회로부터 회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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