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산상설교 2
마태복음 5:5-7절 2016/12/7(수)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을 잠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산상설교’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큰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다.
둘째, 산상설교 서론에 해당하는 ‘팔복’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구원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셋째, 구원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성도의 마음가짐으로 바로 겸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소망하는 자를 뜻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구원의 여정, 첫 번째 단계이다.
넷째,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소망한다는 것은 다시 세 가지 의미로 나누는데,
①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
(자력구원/타력구원)
②자기 속에 선한 것 곧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③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 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호산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기를 소망하는 자가 드리는 기도의 특징입니다.
오늘은 웨슬리의 산상설교 두 번째 시간으로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의 내용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을 때 온유한 자란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앞서 웨슬리 설교가 가진 특징, 하나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성도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오해의 부분을 성서적으로 바로 잡는 데 상당부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상당히 논리적이고 변증적입니다.
어렵구요.
이는 오늘 설교에서도 여실히 나타납니다.
웨슬리는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릇된 온유함에 대해서 먼저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 온유함이 아닌 것들을 먼저 설명합니다.
① 선악간의 사리 분별함 없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감각한 마음, 무신경의 마음은 성경적 온유함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② 불의함을 보고도 목석처럼 저항 할 줄 모르는 사람 역시 성경적 온유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③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열정도 품지 않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참된 온유함이라 무엇인가?
무엇에나 극단을 피하는 마음으로 균형 곧 중심을 잃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평정심’이지요.
‘평정심’을 잃지 않는 마음입니다.
신 5: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어떤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평정심(온윤함)이
하나님으로 향할 때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소망의 인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평정심(온유함)이 이웃에게로 향할 때 부드럽고 온화한 화평의 태도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로 향할 때 자족하는 마음이 나타난다고 웨슬리는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주님이 미워하시는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분별하는 사람만이 이러한 온유의 성품을 가질 수 있다고 웨슬리는 말합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무분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이 점을 아주 강조합니다.
따라서 온유한 자는 아주 분명한 삶의 자세, 삶의 기준이 서 있어야 합니다.
첫째, 악과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갖데 악과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악과 타협하는 순간 한 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악과 손을 잡는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그 꾀에 빠지게 되고, 죄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며 최후에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오만한 자리에까지 앉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장 1절에서 악의 위험성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구원의 여정 vs죄의 여정)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하지만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처럼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의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그 평정심을 가진 온유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온유한 자는 불의와 불법을 미워해야합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의와 불법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것이 기준입니다.
기준이 무너지면 좌로 치우치든 아니면 우로 치우치게 마련입니다.
결국 죄를 대항할 힘을 상실하게 되지요.
그래서 웨슬리는 말합니다.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불의함인지 명확하게 분별하라’
그리고 ‘악을 이겨낼 수 있는 온유함, 평정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웨슬리와 바울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습성을 만만히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었다는 것은 원죄의 문제 곧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 육체가 가지고 있는 죄의 습성마저 완전하게 해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의 습성을 만만히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나 웨슬리나 죄의 습성을 만만히 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탄식입니다.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죄의 습성)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러한 고민은 웨슬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치열한 영적 전투 즉 죄의 뿌리는 잘렸지만 그 죄의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성령의 법으로 살려하지만 육신은 그렇지 못하고 죄의 법 죄의 습성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습성으로 치우치는 마음을 다시 성령의 법, 기준(중심)이지요.
그 기준(중심)을 다시 든든히 세울 수 있도록 하는 방어막이 바로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성품은 정지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치열한 영적 전투를 통하여 날마다 자라야합니다.
언제까지 입니까?
‘악을 이기고 선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온유함이 날마다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유한자, 온유한자가 얻게 되는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은 부동산의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이렇게 오해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전혀 아닙니다.
늘 강조하지만 팔복에서 말하는 ‘복’은 하늘의 복이지 땅의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의 복, 없어질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구원의 여정 속에서 그리고 그 여정이 끝나는 날에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얻게 되는 하늘의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악을 온유함으로 이기는 것을 의미하고(의의 최후 승리)
또 하나는 장차 올 영원한 나라 곧 하늘나라(천국)를 소유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땅에서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다가, 하늘나라에 가서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자가 얻게 되는 복’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의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했을 때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무엇을 말하는가? 입니다.
웨슬리는 이 ‘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공통분모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의’,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그래야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율법 중에 율법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한 그 ‘의’에 우리가 주리고 목마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웨슬리는 3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영적 갈망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사모하는 영적갈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갈망하데 ‘멈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갈망이 절대로 멈추어 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이 주림과 목마름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어떤 복을 받습니까?
다시 5장 6절입니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배부름, 문자 그대로 풀면 더 이상 주림도 목마름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의’ 곧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배부른 것입니다.
아주 큰 복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7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이런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사랑의 배부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웨슬리는 4번째 복인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와 다섯 번째 복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를 서로 연결 짓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7절의 말씀을 좀 더 살피겠습니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다른 말로 자비라고 합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의가 이웃에게로 확장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긍휼은 이웃을 대할 때 두 마음이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판단의 대상 아닌 미움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은 제 아픔으로 그리고 이웃의 기쁨을 제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연약함 그대로, 무지함 그대로, 어리석음 그대로, 취약함 그대로, 부족함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특히 이 두 번째 부분을 아주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도 주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자가 딜 수 있을까?
그 예로 웨슬리가 선택한 본문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여기에 보면 사랑이 없는(긍휼이 없는) 은사의 허무함에 대해서 먼저 소개합니다.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정말 어머 어마한 하나님의 은사들이 나옵니다.
감히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하는 어머 어마한 은사들이 나오는데
첫째, 1절입니다.
방언의 은사와 천사의 말을 하는 은사입니다.
둘째, 2절 예언의 은사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은사입니다.
셋째, 3절 구제의 은사 희생의 은사입니다.
하지만 은사 중에 은사인 사랑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주셨던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사 중에 은사인 사랑의 은사란 무엇인가?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아주 간단하게 요약, 정리만 하겠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할 때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를 해치려는 사악함마저도 용인하고 참는 것입니다.
그것도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7절 마지막에 나오는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도 예사롭지 않지요.
이처럼 사랑은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바로 참 사랑입니다.
감히 인간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이지요.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 그 ‘의’가 정말 충만해야만 실천 가능한 사랑입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친절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살뜰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죄의 성품 중에서 가장 못된 것이 미워하는 마음, 시기인데 참된 사랑은 그 시기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 분수를 알고 제 분수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자신을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난폭하게 대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이익에 관심을 두고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분내는 것 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지요.
아홉 번째, 사랑은 남의 악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열 번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열한 번째, 사랑은 진리와 함께 즐거워합니다.
열두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좋은 점만 발견하려하고 무엇이든 선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열세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다 이유가 있겠지’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열네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모욕에도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긍휼이 여기는 자의 사랑의 덕목이고 그리고 이 긍휼이 여기는 자만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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