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
마태복음 5:7절 2016/12/9(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산상설교 서문에 해당하는 팔복을 보면 유독 눈에 들어 오늘 말씀이 하나 나옵니다.
방금 읽은 본문인데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보통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재의 상태와 장차 받을 하나님의 영광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7절에 나오는 5번째 복만이 현재의 상태와 장차 받을 하나님의 영광의 상태가 서로 같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 자비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긍휼’을 ‘자비’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긍휼과 자비’ 그 어느 것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 곧 자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긍휼히 여기는 자’란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특히, 고난 받는 이들 성경에서는 이들을 고아 과부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는데 쉽게 말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웃을 말합니다.
그 가난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판단의 대상, 미움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확장이지요.
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이웃에게로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웃의 아픔은 내 아픔으로 그리고 이웃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긍휼히 여기는 자’란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명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동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행실이지요.
연약함 그대로, 부족함 그대로, 어리석음 그대로 다가가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속성을 가장 잘 설명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은 서로 시기와 반목 속에 있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첫 번째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 편지 말미에 우리 주님처럼 우리가 실천해야할 사랑의 덕목들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잘 아는 말씀이지만 다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우선 고린도전서 13장 1-3절까지 살피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긍휼함이 없는 은사의 허무함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 보면 정말 어머 어마한 하나님의 은사들이 나옵니다.
감히 우리가 꿈도 꾸지 못하는 어머 어마한 은사들이 나오는데
1절입니다.
‘방언의 은사’와 ‘천사의 말을 하는 은사.’
2절 ‘예언의 은사’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은사.’
3절 ‘구제의 은사’와 ‘희생의 은사’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주셨던 긍휼의 마음이 없으면 이렇게 큰 은사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나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나 유익을 줄 수 있는 은사 중에 은사, 사랑의 은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아주 간단하게 요약, 정리만 하겠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할 때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나를 해치려는 사악함마저도 용인하고 참는 것입니다.
그것도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7절 마지막에 나오는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도 예사롭지 않지요. 이처럼 사랑은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바로 참 사랑입니다.
감히 인간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사랑이지요.
우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해야 실천 가능한 사랑입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친절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아주 살뜰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지요.
죄의 성품 중에서 가장 못된 것이 미워하는 마음, 시기인데 이 시기심으로부터 자유 할 때 그 때 온전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랑이 누군가의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곧 연예계 연말 시상식인데 영화배우 황정민의 숟가락 소상수감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지요.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 분수를 알고 제 분수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자기 자신을 낮춰 낮은 자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가 누구일까?
거기에 우리의 눈길과 손길이 멈추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는 교만한 자입니다.
여섯째,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특히 힘 없는 이를 대할 때 난폭하게 대하거나 괴롭히지 안 는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물질의 이익에 관심을 두고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기심을 가지고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분내는 것 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지요.
아홉 번째, 사랑은 남의 악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악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입니다.
열 번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불의를 보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열한 번째, 사랑은 진리와 함께 즐거워합니다.
불의를 멀리하고 진리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열두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어떻게든지 좋은 점만 발견하려하고 무엇이든 선의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열세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다 이유가 있겠지’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열네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모욕에도 끝까지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 곧 자비한 자가 행할 사랑의 덕목들입니다.
결코 쉽지 않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연수소망교회 양석모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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