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야고보서 강해 1: 16-21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心貧者 2016. 7. 14. 11:01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1: 16-21                                                   2016/7/13()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 사도가 목회할 당시 예루살렘 교회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교회마다 상당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겪는 어려움.

그 경중의 깊이와 내용의 차이가 어느 정도는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통적인 문제를 가지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재림의 지연문제입니다.

사도행전 1장입니다.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가지를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하나는 8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곧 성령의 강림 사건이고

또 하나는 11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약속 중 하나는 곧 이루어졌지만 하나는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곧 이루어진 주님의 약속 무엇입니까?

21절부터 나오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전대미문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처럼 승천 한 날로부터 열흘도 못 되어, 좀 더 자세하게 헤아리면 승천한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자마자 성령의 강림 역사가 제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납니다.

120성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문제는 111절에 나오는 두 번째 약속입니다.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는 예수님의 재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달지 지나고 주님이 승천한 날을 기념하는 1주년이 지나고 2주년이 지나고 3주년이 지나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에 있어서 든든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모두가 뜨거운 성령을 모두 다 체험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주님의 약속을 체험한 산증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진 것처럼 주님의 강림(재림) 역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 의심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목회할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늘 두 가지의 단어를 붙들고 살아갔습니다.

하나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란 뜻을 지닌 아람어 마라나타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그리스도의 강림을 나타내는 헬라어 파루시아입니다.

좀 생소하지요.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새긴 말씀이 마라나타와 파루시아였고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간구한 것이 마라나타와 파루시아였고 그리고 그 간절한 소원을 담아 부른 찬양 역시 마라나타와 파루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점차 이 기대가 사라지게 됩니다.

특히,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귀로만 전해 들었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마라나타와 파루시아신앙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보이지 않았던 이전의 것들이 다시 보여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이후 자신의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고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모이던 사람들과 달리 성령을 귀로만 들었던 이들 중심으로 세상의 것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찬양했던 그래서 모든 세상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샀던 그리스도인들의 매력은 사라지고 세상풍조에 기웃거리는 그리고 시류에 영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관계의 어려움 특히 경제적 어려움입니다.

당시 유대인도 별종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더 별종이었습니다.

그들의 진정성과 정직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두움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정직했고 너무 자비로웠습니다.

그 결과 경제적 어려움을 마치 훈장처럼 달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물론 초대 교인이라고 해서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처럼 큰 부자는 아니지만 빈곤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만큼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상당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과 부유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입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복습하면 이렇습니다.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첫째,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물질에 있어서 부요하지 못한 낮은 자리에 처에 있다 할지라도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그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것, 그 내용이 18절에 나옵니다.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러니 가난하다고 해서 기죽지 말고 또 빈곤 하다고 해서 힘들어 하지 말고 모든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신 그 하나님의 높임을 기억하고 그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반면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왜냐하면)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사도 야고보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의 부유함을 풀의 꽃으로 비유합니다.

화려하지요.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보기에도 참 좋습니다.

문제는 그 좋은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풀의 꽃이 지나가는 것처럼 부유한 자의 부유함은 지나가고 낮아짐 곧 부자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뿌리인 그리스도가 영원히 드러나게 되니 이 또한 자랑할 만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용납하고 지금 당하는 어려움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강림이 지연된다고 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가지 교회의 어려움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그리고 가난한 그리스도인과 부유한 그리스도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 있다고 해서 역시 그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다시 강조합니다.

사도 야고보의 말입니다.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속지 말라는 말은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앞서 살펴본 13절의 말씀처럼 이 모든 시험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주장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한 마디로 지금 당하는 환란 곧 시련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3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첫째, 13절 후반부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에 있어서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느니라

 

성도란 하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각 사람마다 은사의 차이는 있지만 근원적으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다 위로부터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빛 되신 아버지께서 어둠의 시련, 어둠의 시험을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련의 원인을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그 빛이신 아버지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빛의 아버지가 어둠의 시련을 자기 자녀에게 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이 시험하지 않는 이유 18절입니다.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피조물 중에 첫 열매 다시 말해 언약의 장자로 낳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시험으로 그리고 시련의 길로 일부러 내 몰리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은 분이 우리를 시험할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게 우리를 낳은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주는 그런 행동을 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13절의 말씀처럼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시련을 당했을 때 두 가지를 주의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시련의 원망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핀 본문의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시련이 왔을 때 분을 내거나 성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쌓아 놓은 신앙의 덕을 다 까먹을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깨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근심케 하는 그리고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신앙의 덕 그리고 교회의 덕을 위해 속히 행할 것, 듣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의 덕 그리고 교회의 덕을 위해 더디 해야 할 것, 말하는 것 그리고 성내는 것입니다.

시련이 오면 사람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본능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첫째는 원망이고 둘째는 분냄 곧 성내는 일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감당해야 하지

이런 원망은 원망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원망을 넘어 분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성냄이 성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련이 왔을 때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조심하고 말씀을 듣는 온유함 받으라는 것입니다.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말씀의 온유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은 시련 속에서 능히 우리를 구원할 말씀 그리고 이미 우리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덕을 까먹는 분내는 말, 성내는 행동을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첫째, 성도의 시련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빛이신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어둠의 시련을 줄 리 없으니 시련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말고 혹 14절의 말씀처럼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벌어진 일은 아니지 잘 살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련이 왔을 때 성도의 덕 교회의 덕을 해치는 말이나 행동을 자제하고 우리를 시련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평생 자신을 지켜줄 것 만 같은 아버지가 그만 쓰려져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주어진 면회시간에 죽어가는 아버지를 그저 멍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습니다.

왜 착하고 착한 우리 아버지가 이런 험한 꼴을 당해야만 할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나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시는 걸까?

그러다가 꾀 영적으로 뛰어나다고 하는 어느 분의 조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혹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문제없습니까?

혹 하나님 앞에서 빚 진 것 없습니까?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고 물질 좀 심으시지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질을 심는다고 시험거리가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의 결론 21절에 말씀처럼 이미 마음에 심어진 말씀 속에서 구원의 말씀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살려보고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2절의 말씀처럼 여러 가지 시험 속에서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