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하게 셈쳐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20:1-16절 2016/4/1(금)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여기에 좀 첨가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라는 대목인데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의 사정과 같으니’라고 덧붙여 읽으면 본문의 대한 이해가 한결 쉽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과 달리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각주처리해서 ‘하늘나라는 포도원 주인의 사정과 같다'라고 좀 더 친절하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품꾼을 얻어 자신이 가꾼 포도원에 어떻게든지 들여보내려는 집 주인의 사정.
이 집 주인의 속마음을 모르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지금 비유의 배경이 되는 곳은 갈릴리입니다.
갈릴리.
높은 산악지대에 있는 예루살렘과 달리 갈릴리는 그 지형의 경사가 완만한 구릉 지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 빠짐이 좋지요.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포도원 농장이 참 많았습니다.
여름에는 강수량이 적고 지중해로부터 염분을 포함한 바닷바람이 적당히 불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포도나무는 건강했고 포도 열매 역시 매우 달고 풍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을에는 선선하고 건조해서 포도 열매를 추수하고 말리기에는 아주 좋은 최적의 환경가지고 있는 곳이 갈릴리 지역입니다.
문제는 수확 철입니다.
수확 철이 되면 아주 빠른 시일 안에 거둬들여야 했기 때문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런 갈릴리의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열매 수확이 한창 일 때 일입니다.
많은 일손이 필요했지요.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해가 뜨자마자 거리에 나가 일꾼들을 찾아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품삯을 합의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받을 수 있는 하루 품삯입니다.
아침 아홉 시쯤 되자 포도원 주인은 다시 장터로 나갑니다.
우리 성경은 3절에서 제삼시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오전 아홉시를 말합니다.
좀 늦은 아침이지요.
그런데 그 늦은 아침 아홉 시에 다시 나가 보니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라고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 상당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을 한 후 포도원 일꾼으로 삼습니다.
노동력이 얼마나 많이 필요했던지 이번에는 제 육시, 열두 시와 그리고 제 구시, 오후 세 시쯤에도 일꾼들을 불러들입니다.
그만큼 수확 철에는 일손이 달렸던 것입니다.
문제는 6절과 7절입니다.
20: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20: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제 십일 시는 오후 5시입니다.
이제 일할 시간이 겨우 한 시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포도원 주인은 일꾼을 또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 주인이 6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그러자 그 중 한사람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20: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여러분 우리가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사람 절대 쓰지 않지요.
종일 놀고 있는 무능한 사람을 누가 일꾼으로 쓰겠습니까?
그런데 7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예상 밖에 말이 나옵니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어떻습니까?
포도원 주인의 행동,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갈릴리 사람들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 당시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이 소작농입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당시,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바쳐야 할 소작료가 대략 수확의 35-40%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로마가 거둬가는 세금과 종교세까지 내고 나면, 그야말로 남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흉년이라도 들면 삶은 더욱 막막했습니다. 밀린 소작료와 세금을 낼 길이 없으면 남의 짐 머슴이 되거나, 날품팔이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놀며 서 있는 것이 그들의 하루 일과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를 듣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의 사정과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빈둥거리다가 이 놀랄만한 포도원 주인에 대한 비유를 듣는 갈릴리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비유라 할지라도, 하루하루가 절박한 그들에게는 이 비유에 등장하고 있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그 자체였습니다.
이 보다 좋은 소식,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더 놀라운 것은 8절 이후에 나오는 주인의 행동입니다.
해가 서산에 걸리고 일을 마감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품삯을 처 주는 시간이 돌아온 것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일용노동자들에게는 가장 행복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주 심각한 문제가 터집니다.
8절부터 보겠습니다.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20: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릅니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오후 다섯 시쯤에 와서 일을 한 일꾼이나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일꾼이나 모두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만 지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포도원 주인의 행동 이해가 되십니까?
절대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맨 처음에 왔던 이들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이런 법이 어디 있어?’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쯤에서 우리는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초점은 사람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한 만큼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의라고 여깁니다.
대접한 만큼 대접받는 것이 공의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크 센델이 말한 정의란 바로 이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회의 ‘정의’를 말합니다.
각자가 정한 ‘정의’의 원칙과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보편적이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정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산술적인 인간의 원칙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설명은 아니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교회의 보편적인 생각인데
교회를 위해 꽤 큰 금액을 헌금하면 그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또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 헌신하는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말한 하나님의 셈법은 다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셈법은 더욱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우리 셈법대로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셈법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셈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절박한 처지에 있는 그들의 형편에 맞게 대우하는 것입니다.
항상 가난한 자입니다.
항상 애통하는 자입니다.
항상 온유한 자이며 항상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자이고 하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 항상 박해를 받는 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셈법입니다.
물론 이 셈법이 낯설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공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자비가 품고 있는 비밀입니다.
만약, 만약입니다.
하나님의 셈법이 아닌 우리 인간의 셈법대로 우리 자신을 계산한다면, 글쎄요.
구원 받을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또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는 오늘의 본문을 소재로 그림 한 점을 남겼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창가에 탁자가 놓여 있고 주인은 그 옆에 앉아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주목해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빛입니다.
이 빛이 누구를 비추고 있습니까?
모자를 쓰고 붉은색 옷을 입은 주인을 비칩니다.
일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고 있는 포도원 주인에게 환한 빛이 비쳐주고 있습니다.
반면, 품삯을 받고 있는 이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표정과 몸짓입니까?
얼핏 봐도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상당히 짜증난 얼굴로 주인을 바라봅니다.
불량하게 내민 왼손과 구부정한 자세가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데요.
그들 뒤에서 거의 상체를 벗다시피 한 사람의 행동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무 말 없이 포도주 통을 묵묵하게 굴리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포도원 주인으로부터 후하게 셈을 쳐서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 은혜의 빛이 오늘 우리에게 비쳐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 5:17-20 새언약 (0) | 2016.04.13 |
---|---|
빌립보서 3:17-21 누구를 본받을까? (0) | 2016.04.05 |
로마서강해 14:13-23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라 (0) | 2016.04.02 |
요한복음 15:18-21 미움 받을 용기가 있습니까? (0) | 2016.03.22 |
이사야 5:1-7 왜 들포도일까? (0) | 2016.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