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받을 용기가 있습니까?
요한복음 15:18-21절 2016/03/20(종려주일)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몇 주간 세상의 이목을 온통 집중시켰던 것은 바둑 기사(碁師) 이세돌 9단과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이었습니다.
한 기업의 이벤트성 대회였지만 거액의 상금이 걸린 만큼 세상의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특히 바둑의 종주국이라고 서로 자부하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은 거액의 상금만큼이나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이 번 행사를 준비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참여한 사람이나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이나 사람과 인공지능, 인공지능과 사람의 대결을 예측할 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내다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라 할지라도 사람이 만든 기계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둑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 변수인데, 설마 이 변수를 사람처럼 기계가 창조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 속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알파고의 승리 보다는 사람의 승리를 조심스럽게 예측했습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4:1, 알파고,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승리였습니다.
물론 한 번 사람이 이겨보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이 사람을 이긴 것입니다.
씁쓸하지요?
허기야 이제 ‘밥맛은 쿠쿠’이지요.
이미 오래 전에 밥 짓는 일을 쿠쿠에게 빼앗겼습니다.
바둑, 사실 저는 바둑을 잘 모릅니다.
알까기나 오목 정도만 할 수 있지 제대로 된 바둑을 두지 못합니다.
더욱 생소한 것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아티피셜 인텔리전스)이라는 말입니다. 아직도 ‘아티피셜, 인공’이라는 말과 ‘인텔리전스, 지능’이라는 말이 어떻게 함께 융합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공지능’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입력된 정보를 자유롭게 그리고 스스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인공지능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인공 지능의 영역이 어느 단계까지 이를 수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 점점 좁혀져 가고 있다는 것과 인간의 일자리와 설자리가 점점 사라져 갈 수도 있다는 어두운 현실입니다.
그러다가 혼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인공 지능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감히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처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 것이 이런 것들입니다.
인공지능.
과연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성경은 로마서를 통하여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했는데 그런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이길 수 있겠지만 상대를 배려해서 일부러 져 줄 수 있는 자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알고도 속아주는 척 할 수 있을까?
남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런 것들도 인공 지능 속에 프로그램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을 넘어 인공감정을 향에 나아가는 것을 보면 그런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질문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인공이 아닌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인공 지능과 인공 감정과 다른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어쩌면 과학 문명이 주는 혜택 속에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이런 질문을 하도록 몰아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해 답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말한 유일한 책 역시 성경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우리교회가 확실하게 주지 않고 지금처럼 배타적으로 그리고 안일하게 나아간다면 더 이상 교회는 사람들로부터 마음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이 시대의 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
이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을 찾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기준 점이 되는 예수님, 그 분이 누구인가? 에 대한 이해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고백하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고백합니다.
Vere Deus 참 하나님, 그리고 Vere Homo 참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다'라고 교회는 전통적으로 고백합니다.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다.’
이 역설과 신비 그리고 이를 고백하는 이들의 믿음.
이 기준점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우리의 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때, 인간의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그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주님을 따른다.’
곧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말하는 제자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복음서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처럼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모든 복음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위한 제자의 조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가능하다고 한결같이 그리고 준엄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
이것이 제가 해마다 사순절이 오면 묵상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삶이 정말 우리에게도 가능한 일일까?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이에 대한 답보다는 그 마음가짐을 주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드디어 참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참 인간으로서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신 주님이 세상을 떠날 날이 다가왔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철썩 같이 믿고 따르는 이들 특히, 그의 제자들이 이 일로 인해 일대 대 혼란에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뜻도 이루기 전에 죽는다니’ ‘영광을 받기도 전에 죽는다니’
정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단호했습니다.
그래서 일대 대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용기가 되는 말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신 말씀이 18-19절입니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빛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 곧 선한일과 하나님의 공의 곧 옳은 일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배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망이 주는 욕심대로 이끌러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배려하는 자비와 긍휼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윤리나 도덕,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열등감 도덕적인 열패감을 상기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싫어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예언자에게 그리고 예수님시대 제자들에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싫어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둥글둥글하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교훈의 말씀이지요.
그런데 그 본 뜻이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자꾸 왜곡되어 가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나서면 힘 있는 사람이 한 마디 합니다.
‘네가 뭔데, 네 주제를 알고 설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잖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그렇게 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이들이 홀로 선한 일을 따르려는 이들을 미워하는 것에 침묵하는 순간, 그렇게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 하나님의 선한 일과 옳은 일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한동안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대중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습니다.
제목이 참 재미있지요?
‘미움 받을 용기’
이 책이 말하는 내용을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삶이 고달픈 것은 항상 남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는 말합니다.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 갈등을 유발할 만한 말은 가급적 자제하고 살아야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이지만 돌아서서는 늘 불퉁거립니다.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멍에를 매고 사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갈까?
그것은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잘못된 열망과 욕심이 결국 그 삶을 힘겹게 만들고 있다는 이 책의 주장입니다.
어떻습니까?
모든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싶습니까?
모든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삶의 주체가 여러분 자신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처럼 자기 체면만을 중시하는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미움 받을 용기’, 곧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 받을 마음의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어렵지요.
아주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 전에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부인이란 결국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용기, 곧 멸시와 천대 받을 마음의 용기를 가질 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첫 말씀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라는 이 말씀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예수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멸시와 천대, 미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어느 누구도 그 길을 가려하지 않습니다.
미움 받는 길, 멸시 천대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 이상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외치지 않습니다.
불의한 세상 현실을 폭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등진 채 살아가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미움도 박해도 받지 않게 되었지만 문제는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략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멸시 천대의 십자가를 더 이상 지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그래서 세상의 미운 오리새끼가 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현실 속에서 무력하게 서 있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명색이 목사인데, 명색이 지도자인데, 그래서 더 부끄럽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첫 구절입니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 말씀을 위해 앞서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12절부터 읽겠습니다.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 말씀 참 좋지요
그런데 왜 세상은 우리 주님이 전한 하나님 말씀 듣기를 싫어할까요?
왜 이 진리를 전하는 이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미워할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어두움 곧 자기 죄가 들어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 부인 곧 자기를 희생하는 그 길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처럼 우리 주님이 그리고 우리 주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고 그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길을 걷는 이들이 미움을 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할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서로 사랑에 있다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미움 받을 용기를 넘어 서로 사랑할 용기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미움 받을 용기를 갖는 것이라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곧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요?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으로부터입니다.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보혜사 성령)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자기 부인 곧 미움 받을 용기와 그리고 자기 십자가 곧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아마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가사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을 통하여 인간의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가사에 맞는 삶의 대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대구(對句), 그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하여 발현될 때 우리는 비로써 인간의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고난주간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시는 주님의 은총 앞에 겸허히 엎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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