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들포도일까?
이사야 5:1-7절 2016/03/13(사순절 5주)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5: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5: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가장 잘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관찰’입니다.
아마 유일한 취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무심코 지나가는 것들을 잘 살피는 재주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제가 제일 신나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구경, 사물구경, 자연구경입니다.
목사 된 후 변한 것이 하나 있다면 관찰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관찰한 것을 깊이 묵상하는 은사, 달란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이 은사, 달란트가 참 좋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제가 받은 묵상의 감동이나 감격을 글이나 말로 잘 전달할 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그래도 관찰하고 묵상하는 일이 저는 즐겁습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계절과 절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아니 한가롭게 웬 계절 이야기야?’
‘달력이 없나 눈이 없나 왜 맨날 계절이야기야?’
‘봄이면 꽃피고 여름이면 덥고 가을이면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면 추운 것 당연한 일이지 맨날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왜 얘기해?’
맞습니다.
변함없이 반복되는 것이 계절이고 절기입니다.
매해 똑같지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계절과 교회의 절기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계절의 변화, 교회 절기의 변화야말로 변함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다양하게 맛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봄이면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가 되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가 이런 묵상을 해 보는 것입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봄이 되자 겨우내 준비한 씨앗을 고이고이 품고 있다가 땅에 심었습니다.
만약입니다.
만약, 그 씨앗이 땅에 썩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열매는커녕 새싹도 틔우기 힘들 것입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고이 품고 있었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만약입니다.
만약, 그 분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이 땅에서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은커녕 죄 사함의 길, 구원의 길도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을 봅시다.
바울 역시 시절을 쫒는 대단한 관찰자였고 묵상가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자연에 대한 그리고 계절에 대한 관찰과 깊은 묵상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은 자에 부활에 대한 바울의 설명입니다.
15: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15: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15:36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15:37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15:42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시절에 대한 계절에 대한 깊은 관찰과 묵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계절마다 그리고 절기마다 다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좀 설레는 마음으로 다양하게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매사에 사람이든 자연이든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총’, 보입니다.
아주 확연하게 보입니다.
좀 설레는 마음을 가지시고 봄에 돋아나는 새싹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깊이 묵상하는 훈련을 꼭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인 깊은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깊은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합니다.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진 사람을 우리가 하나님의 ‘나비’,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예언자의 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극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교 역할을 한 직분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면 제사장, 왕 그리고 예언자입니다.
이들 중에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 안수식처럼 기름 부음이라는 위임예식을 거행하지 않은 이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언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 예언자의 음성을 듣겠습니까?
오죽했으면 마지막 예언자 세례 요한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빗대겠습니까? 그만큼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나 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시를 당한 이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인 예언자 이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가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기름진 산을 바라보며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다가 포도원을 가꾸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땅을 파고, 땅을 파다가 나온 돌을 제거해 가면서 아주 기름진 옥토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계획한대로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구해다가 심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가꾸었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포도열매를 기대하면서 망대도 세우고 포도즙을 짤 술틀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좋은 포도열매가 맺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추수할 그 날에 무엇이 맺혔는지 아십니까?
포도는 포도인데 쓸모없는 들포도가 맺힌 것입니다.
비유이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예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도원’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을 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포도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원은 그냥 포도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 곧 자기 자신을 빗대어 이른 말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역사를 노래한 시인은 출애굽의 역사를 이렇게 빗대어 시로 표현했습니다.
시편 80:8-9절입니다.
80:8 이집트에서 뺏어온 포도나무(이스라엘을 의미함), 이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에 심으신 후
80:9 그 앞에 땅을 가꾸시니 뿌리박고 널리 퍼졌사옵니다.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8주님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뽑아 오셔서, 뭇 나라를 몰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9땅을 가꾸시고 그 나무의 뿌리를 내리게 하시더니, 그 나무가 온 땅을 채웠습니다.
이처럼 ‘포도원’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민족 그 자체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포도나무가 심겨진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좋은 포도원을 가꾸기 위해 기름진 언덕에 있는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낸 후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포도원을 얼마나 하나님이 아끼셨던지 그곳에 초막이 아니라 굳건한 망대를 세우셨고, 수확 철을 내다보며 포도주 짜는 틀까지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이스라엘을 향한 기대가 너무 컸던가요?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질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를 맺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해 농사 ‘꽝’이 된 것입니다.
실망도 이런 실망이 없지요.
출애굽 시절만 해도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400년 종살이를 통해 천대가 무엇인지, 차별이 무엇인지, 무시당함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 곧 고아, 과부, 나그네의 심정과 그리고 애통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아파하는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성을 하나님이 믿고 이방의 땅 가나안이 젓과 꿀이 흐를 수 있도록 정말 좋은 포도나무인 이스라엘 민족을 심어 포도원 곧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풍요 속에서 그들이 택한 것은 아파하는 하나님의 사랑 곧 자비가 아니라 포악이었습니다.
그것도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 포악이었습니다.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족속을 구원에서 ‘여호와의 포도원’ 곧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정의를 포악으로 바꾸었고, 하나님의 공의를 도리어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곧 아우성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착취한 돈으로 무엇을 한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의 부유한 자들과 지도자들이 무엇을 한 줄 아십니까?
호세야 10장 1절입니다.
10:1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무슨 말입니까?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역설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풍요가 가난한 이들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상 숭배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의 열매가 많이 맺히면 맺힐수록 거짓 제단이 많아지고, 토지의 수확의 열매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돌기둥 곧 우상을 깎아 세우는 일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향해야할 하나님의 풍요가 지금 거짓 제단과 거짓 우상에게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정의를 포악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공의를 도리어 가난한 이들의 아우성으로 바꾼 여호와의 포도원을 가만 두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다시 입을 여십니다.
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5: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이스라엘의 타락,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탐심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분명히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사야의 예언대로 몇 년 지나지 않아 여호와의 포도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맙니다.
비극이지요.
이것을 우리 인생에 빗대어 봅시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영혼들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지 우리는 참 많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런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싶을 정도로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어느 순간 낯선 사람으로 변해 버린 그 분을 만나면 참 마음과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왜 들포도가 되었을까?
왜 하나님의 정의 곧 선한 일과 하나님의 공의 곧 옳은 일을 저버렸을까?
왜 그랬을까?
마침 그 이유를 설명하는 말씀이 신명기 마지막 부분 곧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들려주는 마지막 설교 한 대목에 잘 나타나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32:32 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32: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왜 그랬을까?
소돔의 포도나무, 고모라의 밭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웃들에 대한 환대의 의무를 저버렸다가 멸망한 도시들입니다.
다시 말해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한 것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을 자기 욕망, 자기 정욕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7절을 인용해서 조금 더 설명하면 하나님의 정의 곧 선한 일과 하나님의 공의 곧 옳은 일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2절의 말씀과 4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어떻습니까?
울컥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두 구절을 읽는 순간 마음이 울컥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대언한 하나님의 후회와 한탄이 꼭 우리교회 그리고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스럽기가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 소망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정의 곧 선한 일과 하나님의 공의 곧 옳은 일을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돌아보지 않는 탐욕을 버리고,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품고,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시대의 참상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 이들의 향하여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선한 이웃 그들의 참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들포도로 가득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씩 한 걸음씩이라도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그런 자리로 이끌어 가기를 날마다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임 받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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