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라
로마서 14장 13-23절 2016/3/30(수)
사람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먹는 일입니다.
먹는 일 만큼 중요한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먹는 일로 인해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만 또 먹는 일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괴로움 중에 하나가 무엇을 먹을까? 입니다.
무엇을 먹어 허기를 달랠까?
그리고 무엇을 먹어 몸을 이롭게 할까?
세상 모든 사람의 고민거리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 교회에는 여기에 한 가지 고민이 더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 허용된 음식과 허용되지 않은 음식에 대한 규례를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기 돼지머리 고기와 시루떡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강해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아직 믿음이 약해서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를 묻고 그것이 고사에 사용된 돼지머리 고기나 시루떡이라면 먹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의 행동이 옳습니까?
바울의 의견에 따르면 둘 다 옳습니다.
둘 다 옳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바울은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성스러운 음식인지 아니면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되는 속된 음식인지를 나누지 않습니다.
보통 모든 종교에는 자신이 믿는 신념과 신앙을 위해 금지하는 음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자면, 불교의 경우 어떤 음식을 금지합니까?
살생을 금지하는 교리에 따라 살아 있는 생명체 특히 고기 먹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슬람 같은 경우는 술을 금지하지요.
그리고 유대인처럼 돼지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코셔(Kosher)마크가 찍힌 음식만 먹는 것처럼 무슬림도 할랄(Halal)마크가 찍힌 음식만 먹습니다.
반면 우리 교회는 먹는 문제에 있어서 좀 자유로운 편이지만 한국 개신교회는 술과 담배를 금지합니다. 태국교회는 커피를 금지하고 여호와의 증인과 몰몬교는 콜라 같은 탄산음료를 사탄의 음료라 해서 마시지 않습니다.
이처럼 보통 모든 종교에는 금지된 음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교회 성도들도 이 음식 문제로 인해 늘 시끄러웠습니다.
특히,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가 큰 관심사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의 서민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고기는 주로 이방인 신전에서 제물로 받혔던 고기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값도 싸고 질도 좋았기 때문에 서민들이 아주 많이 이용했습니다.
지금 성도의 교제를 위하 나누는 식탁에 사용된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직 복음의 확신이 미약하고 믿음이 연약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배인 정결규례가 늘 문제가 되었습니다.
현대 유대인들이 코셔 마크가 있어야 그 음식을 맘 놓고 먹는 것처럼 당시 믿음이 연약한 유대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정결 규례에 따라 음식을 가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반면 율법에 자유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일이 생기면 그것이 어니서 났는지 묻거나 따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율법을 넘어 복음 안에서 자유 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확신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14절에 나옵니다.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음식에 있어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확신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부정한 음식이 없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시 20절입니다.
14: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그리고 ‘만물이 다 깨끗하다’
그러니 음식을 정하다 부정하다 규정할 필요가 없는 확신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율법에 매이지 않는 곧 믿음이 강한 자는 먹는 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이 자유로왔습니다.
문제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음식에 관한 서로 다른 주장을 좁히지 못하고 서로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비난하고 정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인 로마 교회가 분란에 휩싸였다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인데 그들은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전혀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비난합니다.
‘어떻게 우상에게 받힌 제물을 먹을 수 있는가?’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더럽다는 것입니다.
양심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아직 율법의 찌꺼기가 남아 있어 특히 음식에 관한 정결규례에 따라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따지는 사람을 향해 ‘꼴통이다. 보수다. 복음도 모른다.’
이렇게 서로를 향하여 비난과 정죄가 난무했습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포도가 있다고 합니다.
먹어야 될까요 말아야할까요?
이거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0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지은 모든 만물은 깨끗하여 거리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손을 거쳐 술로 빚어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여기 하얀 쌀밥이 있다고 합시다.
먹어야 될까요 말아야할까요?
이거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4절의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술로 빚어지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14절의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리고 20절에 말씀처럼 하나님이 지은 모든 만물은 깨끗하여 거리낌이 없다 할지라도 늘 조심 또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가하다는 우리의 자유분방한 이기적이고 경솔한 행실로 인해 우리 형제 특히 믿음이 연약한 자가 깊은 근심과 시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좀 안다고 해서 신학을 좀 배웠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 조심성 즉 이타적인 배려의 마음이 하나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게 두 가지의 당부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음식 문제에 있어서 음식 그 자체의 옳고 그름, 성과 속의 문제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음식에 관한 바울의 원칙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과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신앙 곧 믿음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주의해야합니다.
14: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바울의 첫 번째 당부는 이런 것입니다.
특히,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형제에게 근심되게 하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사랑의 행동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의 발로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날이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날이 부쩍 더워지면 사람들이 찾는 음식이 보신탕입니다.
말이 보신탕 보양탕이지 실은 개고기입니다.
분명히 제게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폐병쟁이였던 저에게는 약이나 다름없는 아주 좋은 음식입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개고기가 좋은 고기는 아닙니다.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개들은 이방인들은 말하지만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어 개고기를 먹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대한 오해이지요.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혹 그것이 믿음이 연역한 형제에게 근심되게 하는 행동이라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조롱하듯이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든든하지는 않지만 그들도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하나의 지체인 공동체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연역한 형제에게 근심되게 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바울의 첫 번째 권면입니다.
두 번째 권면은 19절입니다.
14: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
우리는 내가 옳은 것은 무조건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 간에 화평과 덕을 세워야만 옳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의 일과 서로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항상 3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행동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가?
나 자신에게 선한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덕을 끼칠 수 있는 일인가?
이 세 가지 원칙입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화평을 이루고 서로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기가 태어난 배경이 다르고, 지식의 수준이 다르고, 믿음의 수준이 다르고, 삶의 문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서로가 서로에게 화평과 믿음의 덕을 세우는 자들이 될 수 있을까?
서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서로 판단하다보면 발생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판단할 때마다 서로 부딪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서로 기분이 나쁘니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습니다.
왜 부부싸움이 일어납니까?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할 그 한 가지 때문에 부부싸움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가령 남편이 대학을 나오고 부인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합시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하여튼 무식하기는"입니다.
그런데 그것 건드려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편이 경제적 능력이 없다고 합시다.
그런 남편에게 ‘돈도 못 보는 주제에 자존심은’ 그러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형제에게 거리끼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21절입니다.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아무리 믿음이 연역한 형제라 할지라도 그들이 거리끼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에게 화평의 일과 믿음의 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일을 서로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화평과 덕을 세우는 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먹는 문제로 인해 분란을 겪고 있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14:22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14:23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확신을 가지고 자기 믿음에 근거해서 담대하게 먹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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