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6: 28-34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

心貧者 2016. 1. 19. 12:09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

마태복음6:28-342016/1/17(주일오후)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지난 16일 수요일이 교회력으로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었습니다.

주현절,

주현절을 맞으면 교회는 두 가지의 전통을 기립니다.

하나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하는 전통을 기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전통을 기립니다.

어느 경우이든,

이 주현절은 예수님이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둠의 자녀였던 우리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를 다짐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지내는 절기가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을 보내면서 저는 두 가지의 제목을 두고 묵상했습니다.

첫째, 자기 성찰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깊은 성찰입니다.

죄 아래 팔린 사람인가 아니면 은혜아래 있는 사람인가?

죄의 자녀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왜요?

형편없는 저의 모습이 그리고 비겁한 저의 일상이 늘 비참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찾아낸 답이 로마서 81-2절입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1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8: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2)당신(, 우리)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어떻게 나를 부인할 것인가에 대한 묵상입니다.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지요.(10:38, 16:24, 8:34, 14:27)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목회의 길을 걷고 있으니 주님을 따르는 것, 그 일은 행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문제는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했는데 자기 십자가그게 무엇일까?

그러다가 그 다음 절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은 순간 마음이 무척 무거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바로 제 목숨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목숨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보에 실린 설교제목 보셨습니까?

제목이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말라.’

아주 도전적인 제목입니다.

한국교회 정서 상 종교재판이나 이단에 회부될만한 그런 제목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긴 하나님 나라, 그 복음의 핵심가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아주 가끔,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고 돌아섰을 때, 마치 따스한 봄바람을 만난 것처럼 우리 속에 어떤 생동하는 기운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영이 순결한 사람, 곧 마음이 착한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항상 미소를 잃지 않습니다.

늘 입가에 미소를 묻고 살아갑니다.

또한 이런 분의 특징은 자기 자신, 곧 제 몸에 사로잡히지 않는 삶을 삽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이지요.

그러니 다른 사람의 형편이나 처지에 함께할 뿐만 아니라 늘 깊이 공감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데 마치 제 슬픔처럼 웁니다.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데 마치 제 기쁨처럼 기뻐 뜁니다.

이런 분들 만나면 내 마음마저 순결해지고 부듯해 집니다.

 

하지만 불쾌한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오직 자기중심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늘 매사가 비평적이고 냉소적입니다.

이런 분들 만나면 왠지 모를 불편함을 넘어 불쾌감까지 듭니다.

물론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삶이 너무 힘들고 각박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기심이라는 동굴에 갇혀 더 넓은 사랑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를 비롯한 많은 무리들에게 행한 산상설교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한 마디로 제 목숨과 제 몸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별나지요.

사실 우리의 염려, 어디서 시작됩니까?

제 목숨, 제 몸, 제 자식 아닙니까?

뭐 해먹고 살까?

어디서 살까?

언제까지 살까?

이것이 다 고민이고 염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 내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너희 안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정말 품기 원하는가?’

너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제 목숨, 제 몸을 포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너희의 근심과 염려를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기심의 동굴에 갇혀 있는 한, 그래서 늘 먹고 사는 문제에 마음을 두는 한 가난한 떠돌이 전도자 나사렛 예수를 결코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6:25)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기심의 동굴에 갇혀 있는 한 나사렛 사람 예수를 주님으로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세상의 질서는 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최고지요.

그래서인지 돈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라 여기고, 돈이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차가 좋은 차지요?

비싼 차.

어떤 집이 좋은 집이지요?

비싼 집.

어떤 음식이 좋은 음식입니까?

비싼 음식

본능이지요.

이것을 우리 주님이 모르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위해, 마실 것을 위해, 또 입을 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함을 모르고 한 말씀이 아닙니다.

특히, 로마의 압제 속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는 생존 본능입니다. 식민지 백성의 본능입니다.

이것 주님이 모르고 철없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경계하시는 것은 먹고 마시고 입는 그 염려 때문에 놓치는 또 다른 세상의 가치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천국, 하늘나라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이상(지향, 목적)입니다. 이기심의 동굴에 갇혀 있는 한 결코 하늘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맛보기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26-28절입니다.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우리가 때문에 미처 주목하지 않았던 세계를 한 번 보라는 것입니다.

이기심에 동굴에 갇혀 늘 보고도 깨닫지 못했던, 그 세계를 한 번 주목해서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28절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표현은 아주 시적이고 매우 아름답지만 가히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종교재판으로 회부될 만한 그런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건들지 말아야할 사람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사람, 솔로몬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29절입니다.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매불망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화려한 부활만을 꿈꾸는 유대사회에 던진, 예수님의 이 도전적인 말씀은 그 자체가 반역입니다.

 

열왕기상 10장을 보겠습니다.

10:14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10:15 그 외에 또 상인들과 무역하는 객상과 아라비아의 모든 왕들과 나라의 고관들에게서도 가져온지라

10:16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이백 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육백 세겔이며

10:17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삼백 개를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삼 마네라 왕이 이것들을 레바논 나무 궁에 두었더라

10:18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10:19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는 자리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서 있으며

10:20 또 열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 서 있으니 어느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

10:21 솔로몬 왕이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10:22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한 번씩 금과 은과 상아와 원숭이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

10:23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의 그 어느 왕보다 큰지라

지금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가장 즐겨 찾아 읽는 말씀 중에 한 부분입니다.

여기에 보면 솔로몬 시대가 얼마나 화려하고 풍요로웠는지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수백 개의 방패에 금을 입혀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부각시켰습니다.

최고급 상아로 자신의 보좌를 크게 만들고, 거기에다 잘 정련된 금을 입혔습니다.

여섯 계단 위에 놓인 솔로몬의 보좌는 일곱 번째 계단이 됨으로써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 오직 자신뿐임을 만방에 드러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사용하는 모든 그릇은 다 금이었고 은은 귀금속 측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솔로몬 시대는 황금시대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들의 백합화를 가리키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반전이지요.

세상의 이런 반전이 어디 있습니까?

솔로몬의 영화로움?

그건 하늘나라에서 들꽃 한 송이만도 못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영화로우신 분, 진짜 위대하신 분, 왕 중의 왕은 누구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솔직하게 살펴봅시다.

사람이 못 되서가 아닙니다.

우리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내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먼저 구하지요.

본능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너무 익숙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희생과 헌신이 교회 안에서도 점점 낯설게 다가오고 바보 같은 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들에 핀 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을 공중의 새보다 들의 백합화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긍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시편 131편의 고백이 내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31:1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131:2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131:3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